울주 천전리각석 앞 대곡천에 비친 산 빛이 참 곱다. 찻길에서 멀지 않은데, 널찍한 바위 곳곳에 공룡 발자국이 있어 아득한 옛날 풍경으로 빠져든다. <울주=최흥수기자>
각석 맞은편 바위 곳곳에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다.
오후 4시 암벽에 빛이 들면 수 천년 전 원시 동물과 인물이 애니메이션처럼 살아 꿈틀댄다. 전망대 옆 안내판에 붙은 사진을 찍었다.
울산은 익숙한데 울주는 잘 모른다. 울산 면적의 70%가 넘고, 인구도 군 단위에서는 대구 달성에 이어 전국에서 2번째로 많은 현실에 비하면 좀 억울할 법도 하다. 두동면에서 언양읍을 거쳐 범서읍으로 흐르는 대곡천이 그렇다.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은 꽤 알려졌는데, 그곳으로 가는 대곡천의 아름다움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고대 인류의 흔적과 만나는, 수천 년의 이야기를 품은 계곡이다.
반구대암각화 보러 가는 길은 ‘봄소풍’
언양읍에서 경주로 연결되는 35번 국도를 따라가다 반구대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바로 대곡천이다. 산자락도 고만고만하고 계곡도 깊지 않은데 풍경은 바로 깊은 산중이다. 대곡(大谷), 그러니까 큰 골짜기라는 지명은 실제 산세보다 그 분위기에서 비롯한 듯하다. 요즘에도 이곳 대곡마을(한글로는 ‘한실’이다)에서 나는 산나물은 언양 오일장에서 최고의 품질로 대접받는다. 언양이 영축산 신불산 가지산으로 이어지는 1,000m급 영남알프스 산줄기에 둘러싸인 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의외다.
계곡 초입의 울산암각화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반구대암각화까지는 약 1km 정도 걸어야 한다.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면 하천이 크게 휘어 도는 바깥쪽에 반구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머리를 동으로 하고 거북이 엎드려 있는 형상의 바위, 반구대(盤龜臺) 맞은편이다. 언양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 정몽주(1338~1392)가 유배 온 곳이어서 ‘포은대(圃隱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조선조에는 이언적(1491~1553)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정구(1543~1620)가 거처로 삼으려 한 곳이다. 대곡천의 아름다움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졌던 셈이다. 반구서원은 1713년 위의 세 선현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후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최근 복원했다.
서원을 지나 한결 좁아진 길모퉁이 바위엔 울진 대곡리 ‘연로개수기’가 상세히 새겨져 있다. 1655년에 기록한 것으로 보아 ‘연로(硯路)’라는 길이 그 이전부터 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 바위는 슬레이트처럼 편편하게 갈라져 벼루의 재료로도 쓰이는 점판암이다. ‘벼룻길’이라는 옛 이름이 우연은 아닌 듯하다. 모퉁이를 돌아 암각화로 가려면 다시 한번 계곡을 건넌다. 나무 다리 왼편에 형성된 늪에 연초록 산 빛이 내려 앉아 눈이 부시다. 다리를 건너면 대숲을 지나고 물 빠진 하천 주변은 온통 버드나무 군락이다. 강변에서 산자락을 오르는 계절의 변화가 또 한 폭의 수채화다.
한적한 산골, 소풍 가듯 발걸음이 가볍다. 그리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 드디어 오래된 과거와 만난다. 반구대암각화(국보 제285호)는 강 건너편, 테라스처럼 층층이 쌓인 바위 절벽에 그려져 있다. 안내판 사진을 한 번 훑은 후, 벅찬 마음에 호흡을 가다듬고 고정된 망원경에 눈을 붙였다. 안내판에는 ‘지금까지 조사된 암각화는 약 300점으로 바다와 육지동물, 사냥과 어로 장면들이 있다.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 바다거북 물고기와 상어 등 바다동물과 사향사슴 노루 산양 호랑이 멧돼지 늑대 산토끼 등의 육지동물 그림이 잘 남아 있다’고 적혀 있다. 선사시대 인물과 자연과 생활상이 8,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바로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될 순간이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잘 모르겠다. 암갈색 바위에 금이 간 자국만은 선명하다. 가로 약 8m, 세로 5m 중심 암면에 그림이 집중돼 있고, 절벽 윗부분에 처마처럼 튀어나온 바위가 오랜 세월 비바람으로부터 그림을 잘 보호해 왔다는데, 다시 봐도 사진처럼 또렷하지 않다. 안내판 사진은 과장이었을까?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보니 바로 아래에 관람하기 좋은 시간이 적혀 있다. 암각화 벽면이 북측을 향해 있어 봄에는 오후 4시~5시30분, 여름에는 3시20분~6시에 그림이 선명해진단다. 시간도 제대로 못 맞췄을 뿐 아니라 날까지 흐렸으니 헤엄치는 고래, 포효하는 호랑이가 빛의 움직임 대로 살아 꿈틀대는 감동의 시간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천전리각석 계곡에는 공룡시대의 감동까지
이곳에서 약 2km 거슬러 두동면 대곡천에도 고대인의 예술혼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암각화가 아니라 ‘천전리각석(刻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림과 함께 연대가 확실한 기록이 함께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폭 9.5m, 높이 약 2.7m의 천전리각석(국보 제147호)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70년이다. 동남향으로 살짝 기울어진 바위에는 각종 동물과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심원 나선형 마름모꼴이 결합된 추상적인 문양, 역사시대의 돛을 단 배와 함께 신라시대 명문(明文)이 덧새겨져 있다. 법흥왕의 동생 사부지갈문왕이 525년 이곳을 다녀갔다는 내용과, 539년 그의 부인 지몰시혜(只沒尸兮)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어린 아들(후에 진흥왕)과 함께 찾았다는 사실이 나란히 기록돼 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와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가 발견되기 전까지 가장 오래된 신라시대 명문이었다.
천전리각석 바로 앞 왕족이 노닐던 여울은 여전히 그윽하고 아름답다. 갈문왕 기록에는 ‘계곡이 오래됐지만 이름이 없다’고 적혀 있는데, ‘각석계곡’이라 부르는 것 외에 마땅한 이름이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지역에는 소문난 피서지였다. 만나는 주민들마다 계곡에서 물고기 잡고 너럭바위에 둘러앉아 수박을 쪼개 먹었다는 추억담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었다. 울산시민의 상수원으로 보호하고 있는 지금, 투명한 계곡에는 팔뚝만한 잉어가 떼를 지어 노닐고, 널찍한 바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공룡 발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인간이 그 아름다움을 알아채기 전부터 뭇 생명이 노닐던 낙원이었던 셈이다. 산 빛 담은 잔잔한 수면에 햇살이 반짝이고, 살짝 부는 바람에 물결이 살랑대면 풍경은 영락없이 공룡시대이고 문명 이전의 비경이다.
<
울주=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