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당연함이 당연해지는 과정

2018-04-30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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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이 당연해지는 과정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한시간 반 동안 학과 교수와 대학원생들 앞에서 박사논문 발표를 막 마쳤다. 분명히 처음 시작할 때는 그런대로 잘 했던 것 같은데, 후반부로 갈수록 말이 꼬이고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마치 청중들이 내 부족함을 꺼내다가 반죽해서 내 앞에 들이밀며 “이게 네 부족함이야! 이 친구를 앞으로 잘 빚어야 박사논문도 제대로 쓸 수 있을 거야!” 하고 말해주는 기분이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터라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건네받은 내 부족함을 요리조리 뜯어봤다. 지금 상태로는 답이 없는 걸…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국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말이든지 하고 싶었다.

발표 무사히 마쳤다고, 지적도 좋은 의견도 많이 받았다고,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갔다. “옆집 에이미네 사촌의 동생 강아지가 어떻다더라” 같은 말을 할 때처럼 삭막한 어투로. 이런 사막 같은 내 말 속에서 뭔가 반짝이는 보석이라도 찾은 듯 그는 말했다. “영어로 한 시간 반 동안 발표를 하다니 대단하다!” 라고.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3년 반 이상이 되었고, 미국에서 산 시간도 4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대학교 신입생 혹은 어학연수생 대상 ESL 수업을 여러 학기 동안 받았고, 박사과정 1-2년차 학생을 대상으로 한 수업도 공동으로 가르치고 있다. 한 시간 반 발표가 뭐가 대수란 말인가.

남자친구의 말이 마치 “너는 참 숨을 잘 쉬는구나!” 혹은 “너는 참 잘 걷는구나!” 같이 들렸다. 내가 밥벌이할 수 있는 건 영어로 원활히 의사소통하고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고, 그저 물고기가 물 속에서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인데.

다섯 살 아이가 걸어 다니는 건 당연하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아이가 사칙연산을 할 줄 아는 것도 당연하다. 중학생이 현대소설 한 권을 읽어낼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대학생이 에세이를 쓸 수 있는 것도 당연하고, 직장인이 이메일을 다룰 수 있는 것도 당연하며, 대학원생이 논문을 읽을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을 하나하나 달성해간다. 태어나서 폐로 호흡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고, 걷고, 숫자와 한글과 알파벳을 능숙하게 쓰는 법을 익힌다. 이 때 쌓은 신체능력과 지적능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면서 더 높은 과업을 성취해 나간다.

영어발표도 나에게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의무교육을 받는 동안 기초영어를 익혔고, 한국의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전공수업에서 영어발표를 해야 했다. 이후 교환학생을 가서도 영어로 생활했고, 응용언어학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한 이후로는 내가 영어를 하고 있는지 한국어를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영어 논문 글쓰기가 부족한 게 느껴져서 많은 연습을 하고 있다. 그저 그 때 주어진 과업을 하나씩 끝냈고, 지금의 내게 주어진 과업을 성실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친구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당연한 과업을 해내기 위해 얼마나 무수한 노력을 해왔던가. 아기가 제대로 걷고 뛰려면 사물을 붙잡고 서는 운동을 오랫동안 해야 하며, 수없이 넘어져 본 후에야 균형을 잡고 두 발로 똑바로 걸을 수 있다. 사칙연산을 제대로 하려면 수없이 많은 교과서와 문제집, 학습지를 풀어봐야 한다.

당연해 보이는 일 뒤에는 아주 오랫동안 쌓여 온 연습과 노력이 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일이 당연해진다. 당연함이 당연해지는 과정은 당연하지 않다.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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