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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금지된 장난

2018-04-27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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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금지된 장난
예술은 사기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말이다. 그렇다면 책상 머리에 앉아 무언가를 골몰하고 있는 나 역시, 어쩌면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사기를 칠까 궁리하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하더라도 가장 화나는 순간은 사기를 치고 싶어도 사기를 칠 수 없는 한계를 느낄 때이다. 그것은 예술이야말로 스스로를 잊게하는, 진정한 사기이기 때문이다.

가끔 가슴 속에서 사기를 당하고 싶을 때,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듣곤한다. 그것은 이 음악이 화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매우 로맨틱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곡은 ‘로맨스’와는 전혀 관계없는 작품이다. 극 중 클라라 소녀는 단지 호두까기 인형에 대한 환상이 있는 소녀였을 뿐이다. 어느날 생각치도 못했던 인형이 생겼고 그리고 그 꿈(인형)이 동생에 의해 두 동강이 났을 때 그 꿈은 가슴 아픈 현실로 변하고 왕자님(인형)과 함께 환상의 춤나라 여행을 떠나게 된다. 사람의 진심이란 부러졌을 때 더욱 확연히 드러나기 마련인지도 모른다. 단순한 하나의 인형과 소녀와의 사랑… 동심은 천국이라했지만 아마도 이 동심을 훔치는 자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아닐까.

초등학교 5학년때, 마당에 꽃밭을 가꾸던 이웃 집에 같은 학교 다니던 5학년 소녀가 살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예뻐서 그녀가 나타나면 늘 얼굴이 빨개졌고 슬그머니 피하곤했다. 등하교길에 그녀가 보이면 돌아서 갔고 학교 복도에서 마주쳐도 모른척 하곤 했다. 나는 가끔 개구장이 친구들과 그녀의 창문이 보이는 마당에서 구슬치기를 하곤했었는데 어느날 그녀가 창문을 빠꿈히 열더니 말을 걸어왔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디론가 숨고 싶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러한 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더욱 깔깔 웃으며 한참을 재재거렸다. 여자애들이 당돌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고, 그후 나는 다시는 그곳에서 구슬치기를 할 수 없었다.


학교의 모든 여자애들을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그녀는 내가 본 여자 애들 중에서 가장 예뻤고 단순히 그것만으로 그녀와 담 하나 사이를 두고 (이웃에서) 산다는 것이 자랑스럽곤 했는데 왜 그렇게 숨고만 싶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마음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잊는 또 스스로를 속였던, 감정의 사기는 아니었을까. 지금도 노란색 투피스를 즐겨입던 그녀가 (노란색) 우산을 쓰고 걷던 등교길 정경이 봄날의 안개처럼 종종 떠오르곤 하는데 그것은 나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먼 다른 세계의 꿈이긴했지만 또한 그 자체로서 나에게는 너무도 아름다운 하나의 동화이기도 하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실이라는 아름다운 꿈을 그리고 싶은 욕망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性이라는 이성(異姓)의 경계가 없는 로맨스가 사실은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는 아닐까?

영화 ‘금지된 장난’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곤하는 것은 이 영화가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성(異姓)의 경계가 없는,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무 어리고, 맑은 이야기여서 그것을 로맨스라고 하기에도 그렇지만 아무튼 이 작품은 배경음악 ‘로망스’ 때문에도 우리들의 가슴이 찡하게 아려오는, 잡힐 듯 말듯 마치 안개에 가려져 무언가에 홀리고 사기당하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그랬듯, 어느 잠 안 오는 밤 TV에서 방영됐던 명화극장에서 보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찬바람이 쌩쌩불던 어느 겨울밤, 아랫목에서 뒹굴뒹굴 군밤을 까먹으며 명화극장을 감상하던 낭만은 지금도 하나의 추억거리지만 그중에서 가장 압권 중의 하나가 아마도 이 ‘금지된 장난’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전쟁영화 중의 하나로서, ‘사랑할 때와 죽을때’ 같은 작품도 꽤 로맨틱한 작품에 속하지만 ‘금지된 장난’은 졸지에 고아가 된 어느 여자 아이의 극단적인 상황, 그리고 금지된 장난 등 사람들의 가슴 속에 십자가의 상처를 수없이 긋게하는, 안타깝고도 아름다운 명화였다.

‘금지된 장난’ / Jeux Interdits (Forbidden Games) 은 Rene Clement 감독이 매가폰을 잡은 1952년판 102분 짜리 흑백 영화로서, 그해 베니스 영화제 작품상, 아카데미상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폭격으로 부모를 잃게 된 다섯 살 꼬마 뽈레뜨는 시골 마을에 사는 미셸을 강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친절한 미셸은 죽은 강아지를 안고 있던 뽈레뜨에게 무덤을 만들어 주면서 이들은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어른들 몰래 수많은 십자가들을 훔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어른들이 말하는 ‘금지된 장난’이었는데 세월은 흘러 뽈레뜨는 어느 날 적십자사 직원의 손에 이끌려 다시 대도시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아껴준 미셸을 잊지 못하는 뽈레뜨는 거리로 뛰쳐나가 미셸을 부르고, 이 마지막 장면에서 로망스가 흐르며 사람들은 삶의 애절함과 전쟁의 잔인함에 가슴 뭉클 울먹이게 된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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