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 시절 그 여중생

2018-03-26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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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그 여중생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대학 입학한 지 딱 한 달이 되던 10년 전 4월, 모든 게 새롭고 들뜨던 때였다. 밤 11시가 가까운 시각, 집에 돌아가려고 지하철을 탔다. 꾸벅꾸벅 쪽잠을 자다가 눈을 살짝 떴는데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곤 다시 잠들고, 내릴 때가 가까워 졌나 확인하곤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아까 눈이 마주쳤던 남자가 또 내 앞에 있다. 뭐 다른 사람도 많은데 싶어 다시 잠들었다.

드디어 내릴 역이 다 되어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내릴 준비를 했다. 지하철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나가려고 하는데, 아까 눈이 마주쳤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잠깐만 얘기 좀 할 수 있냐고.

개찰구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내용인즉 예뻐서 계속 보고 있었고 꼭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이름은 뭐고 어느 학교에 다니고 나이는 몇 살이냐고 … . 나는 당시 17살이었다. 자신은 27살이라고 밝힌 그는 밤이 늦긴 했지만 자기가 스쿠터로 데려다 줄 수 있다며 차라도 마시고 갈 수 있겠냐고 했다.


“아, 지금까지 공부만 하느라 몰랐는데 내가 나름 인기가 있구나!” 싶었다. 기분이 좋아서 가자는 대로 따라갔다. 호프집에 들어가서 키위주스를 얻어 마시고 대화를 하다가 열두시가 넘은 시각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엄마 딸 인기 많아~” 하며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딸이 인기가 많다는데 엄마가 왜 이러지?” 했는데, 엄마는 “집으로 잘 돌아와서 천만다행이지 남자가 혹여 나쁜 맘이라도 먹었으면 어떡했을 거냐”고 되물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혹시 그 남자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었으면 내가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처음 보는 사람을 의심 없이 따라가다니!

최근의 미투 운동과, ‘펜스 룰’의 유행을 보면서 나는 이 경험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통할 수 있을까. 그날 처음 본 남자를 따라간 건 나지만, 당시 17살 미성년자이던 나를 자정 가까운 시각에 꼭 호프집으로 데려갔어야 했을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면, 좀 더 어른답게 현명하게 제안해 줄 수는 없었을까?

상대가 안전하다고 느낄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가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배려해 줄 수는 없었을까? 좀 더 조심해 줄 수는 없었을까?

우리 사회는 여성이 아주 어릴 때부터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처음 보는 남자는 의심하고, 밤늦게 혼자 다니지 말고, 몸이 드러나는 옷 입지 말고, 술 마시지 말고, 남자랑 단둘이 있지 말라고.

이제는 여성뿐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조심할 때다. 무슨 행동을 하든지 상대의 동의를 먼저 받기, 술을 마셨거나 잠자고 있거나 장애가 있거나 미성년자라서 제대로 된 ‘동의’를 할 수 없는 상대에게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기, 상하관계에서 위에 있다면 아랫사람이 거절하기 어려움을 미리 인지하고 배려하기, 자신이 상대방에게 물어볼 자유가 있듯, 상대방이 거절할 자유도 있다는 걸 알기. 이렇게나 간단한 이야기다.

“미투 당할까 봐” 여성과는 아예 접촉을 하지 않거나, 여성 직원과 남성 직원을 격리하거나, 여성 직원을 뽑지 않는 건 자신의 사상이 남녀칠세부동석 시절과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외치는 것과 진배없다. 서로 안전한 거리를 지키는 것. 서로 조심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 그게 전부다.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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