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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의 재발견

2018-03-24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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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남가주에서는 어느 노신사를 위한 85세 생일축하 모임이 있었다. 데이빗 류 LA 시의원 등 한인 1.5세, 2세들이 주축이 된 모임의 주인공은 은퇴 후 옛일 회고하며 소일하는 원로가 아니다. 여전히 현장을 누비는 민병수 변호사이다.

한인사회에 변호사가 귀하디귀하던 1975년 변호사가 된 그는 한인 최고령 형법 전문변호사로 여전히 현역이다. 70~80년대 한인사회가 태동되던 때부터 커뮤니티 권익신장에 앞장 서왔던 그는 세계한국교육자네트워크(IKEN) 등 단체를 통한 봉사활동에도 여전히 관여하고 있다.

“건강만 좋으면 평생 사회활동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나이 들어도 혼자 조용히 시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의견을 나누고 친구처럼 지내는 걸 좋아합니다.”


2011년 여름 안구암으로 왼쪽 안구적출 수술을 받은 후, 한쪽 눈으로 보려니 한동안 불편했지만, 적응하고 나니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운전, 독서, 변호사 업무 수행에 아무 지장이 없다. 업무량을 줄이고 거리가 너무 먼 법정 일은 맡지 않는 정도로 80대 중반의 나이든 몸을 배려하고 있다.

지난 17일 UC 어바인 의과대학에서는 감사패 증정식이 있었다. 주인공은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 운동으로 잘 알려진 소망소사이어티의 유분자 이사장이다. 비우고 내어줌으로써 의미 있게 삶을 마무리하자는 운동의 일환으로 소망소사이어티는 UC 어바인 의대의 시신기증 프로그램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사후 몸을 기증해 의학발전에 기여한다는 취지에 많은 한인들이 공감했다. 한인 시신기증 약정자가 1,200명을 넘어서자 대학 측은 한인사회에 감사를 표하고 시신기증 안내와 교육을 맡아온 소망소사이어티의 유 이사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유 이사장이 소망소사이어티를 창립한 것은 2007년 가을이었다. 사업에서 은퇴하고 이제는 쉴 나이다 싶은 72살에 그는 꼭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다. 한인 1세대가 노년에 이르면서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지난 10년 소망소사이어티는 죽음준비 운동에 더해, 아프리카 차드에 우물을 파고 유치원을 세워주는 생명 살리기 운동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83세의 유 이사장은 머나먼 아프리카에 3번이나 원정을 가고, 외부강연이 줄을 이을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민 변호사와 유 이사장에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롤 모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차 80대의 보편적인 모습을 지금 그들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지난 22일 한국통계청은 2017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인구(13.8%)가 14세 이하 유소년인구(13.1%)를 추월했다고 발표했다. 출산은 줄고 기대수명은 늘어나면서 노인 인구가 급속히 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이 인구의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에 일본은 이미 진입했고, 한국은 2025년, 미국은 2032년에 진입할 예정이다.

노인 인구가 이렇게 많은 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사회에 우리가 들어선 것이다. 아울러 이제까지 구경하지 못한 새로운 그룹이 등장한다. 건강하게 활동하는 80대 혹은 90대이다. 불과 반세기 전만해도 나이 50이면 노인, 60 넘으면 세상을 떠났다. 오늘의 80대 90대는 롤 모델 없이 그 나이를 맞은 나이 전선의 개척자들인 셈이다.


노년층이 늘면서 노년 혹은 늙음에 대한 시각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젊음을 찬양하는 문화에서 늙음은 추한 것, 약한 것, 치료 불가능한 질병 같은 것으로 부정적이다. 젊어 보이려 발버둥 치는 심리 덕분에 미국의 노화방지 산업은 연 2.500억 달러 규모에 달한다.

늙음은 그렇게 부정적이기만 한 걸까. 노인정신학 전문가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나이 듦으로 인해 잃어버리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신체와 인지기능 저하, 지병으로 인한 제약 등이 전자라면 산전수전 겪으며 얻은 지혜, 회복력, 감사하는 자세, 정신적 안정감 등은 후자에 속한다.

실제로 ‘나이 듦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가장 즐거울 것 같은 젊은이들이 사실은 가장 스트레스가 심하고 노년이 될수록 행복감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UC 샌디에고 노화센터가 21세부터 99세까지의 주민 1,5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취직, 결혼, 집 페이먼트, 아이들 교육비, 직장일과 가사 사이의 갈등 등 스트레스에서 놓여날 날 없는 것이 젊은 날이다. 이 모두를 졸업한 노년은 여유롭고 여유로우니 행복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가장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시기이다.

이런 멋진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이 듦은 설렘일 수 있다. 주변의 롤 모델들을 보며 긍정적이고 창의적으로 노년을 준비하면 좋겠다. 늙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늙음 덕분에 얻는 새로운 경험들이 있다. 나이 듦의 재발견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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