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인과 야만

2018-03-23 (금)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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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야만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우리는 왜 시를 읽는가? 이 냉랭한 세상에서 나만 외로운 존재가 아님을 일깨워주고,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속일지라도 산 너머 남촌엔 보리가 구수하게 익어 감을 믿기 때문 아닌가? 몸은 늙어가도 내 속 유년의 꿈을 지켜 주고, 어디선가 슬피 우는 타인의 삶에 손 뻗어 닿았던 기억 때문 아닌가? 그래서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없을지라도 시적인 삶은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어온 게 아닌가?

“난 자유롭게 살려고 숲 속에 왔어.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며 사려 깊게 살려고 펜을 들었어. 삶이 아닌 것을 모두 이겨내고, 삶이 다했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고 시를 썼어”.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이 대사는 글을 쓰는 내게 오랫동안 시적인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그런데 살아있는 전설, 망구(望九)의 노 시인이 비(非)시적인 삶에 넘어져서 평생 써온 훈장 같은 시들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유수 같은 장단시들은 교과서에서 퇴출되고, 문화재처럼 전시되었던 그의 시방엔 대못이 박혔다.


왜 그랬을까? 동서양 철학을 넘나들던 그가 “시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한마디로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한 공자의 말씀을 몰랐을 리가 없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시가 권력이 된 탓이란 말에 공감한다.

글의 권력이 약자들을 수탈한 것이다. 문단이 문학적 자격을 부여하는 통로이자 작품발표 등 작가 개개인의 생계와 연결되는 금력까지 쥐면서 쉽게 성추문으로 변질되었다는 진단에 신빙성이 실린다.

‘시인이란 고도로 도덕적인 존재인 동시에 도덕을 넘어서는 존재다’라는 가설도 권력자가 오도할 수 있다. 작가가 예술을 위해선 위법도 허용된다는 저급한 윤리의식으로 약자를 짓밟는 것은 분명 야만이다.

오랫동안 해외에 살며 글을 써온 우리는 이번 노 시인과 한국 문단을 둘러싼 추문으로 받은 충격이 크다. 미국과 한국에서 문학 집회에 참석, 강의도 듣고 개인적인 담론도 나눈 대가라 마음에 상처가 더욱 깊다.

지금은 거의 없지만, 예전엔 간혹 한국문단 기성작가 중에 준비가 안 된 동포들에게 등단과 출간의 샛길을 알선한 예도 있었다. 또, 기성작가의 허명에 맹목적인 갈채를 보낸 이곳 동호인들도 없지 않았다. 그 때, 문학도 일종의 권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다.

그러나 뛰어난 문학적 역량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시인의 도덕적 추락을 보면서 과연 시 정신이 무엇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글이 곧 사람이라고 하는 데 과연 그러한가? 정신적인 시가 어떻게 육체적 야만에 굴종한 것일까?

시 정신은 결핍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시인이 망한 것은 시의 양도 질도 아니고 달콤한 권력의 풍요 속에서 시 정신이 변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타고난 재능이나, 연맥이나, 관록으로 잘 짜여진 양탄자 같은 시보다 결핍된 환경 속에서 한 땀 한 땀, 땀으로 엮은 새끼 돗자리 같은 시가 더 정신적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이민자인 우리는 문학토양의 결핍 속에 살아왔다. 열악한 문학 정진의 환경 속에서 생업에 매달리며 짬짬이 이민의 삶을 모국어로 승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종종 문학전문가들로부터 역량이나 작품성을 폄하당하면서도 부끄럼 없는 글을 쓰려 노력했다. 감히 이것이 시 정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소설가 박경리는 말했다. 곧, 인간과 글은 같아야 한다는 뜻일 게다. 암만 글재주가 좋아도 속사람이 야만이면 언젠가는 낙마한다는 교훈을 얻고 있다. 글은 속여도 사람은 속일 수 없다. 결핍 속에 핀 시 정신만이 시인을 살린다.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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