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펜스 룰’ 은 답이 아니다

2018-03-19 (월)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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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스 룰’ 은 답이 아니다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미투 운동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혹시라도 억울하게 가해자로 지목돼 공개적 망신을 당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이제라도 남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조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동안 우리 남자들은 너무 편하게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에서 조신함은 남자의 덕목이기도 하다는 걸 배울 때가 왔다.

어느 학급에나 학습이 부진한 학생이 있듯, 미투 운동의 교훈을 오해하는 남자들이 있다. 일부 남자들은 “아내 이외의 여자들과는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펜스 룰’을 미투 운동에 대한 해답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미투 운동의 핵심적 요구를 아예 회피해버리는 잘못된 대응이다.

미투 운동의 요점은 ‘여자를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지 말라’는 것이고,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인간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남자는 아예 여자와 교류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대부분의 직장에서 자원과 지위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남자들의 교류범위를 동성집단 안으로만 한정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여성을 사회활동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배제하고 이미 팽배해있는 성차별을 재생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사무실에서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밥을 먹거나 커피나 술을 마시면서도 직장생활의 노하우나 중요한 정보들을 공유하고 의미 있는 의사결정을 내린다. 여자동료들을 배제하고 남자들끼리만 자리를 가지면, 중요한 정보나 의사결정이 남자들 사이에서만 공유될 것이다. 이것은 심각하게 불공평한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페이스북의 최고운영 책임자 셰릴 샌드버그가 좋은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직장의 여자동료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어떻게든 피하겠다면, 다른 남자동료들과도 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시라.

남자들이 이제부터 ‘펜스 룰’을 따르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여성을 따돌리고 배제하는 조직문화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묵인하고 은폐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잠깐이라도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한국기업의 인사과는 새 직원을 뽑을 때마다 ‘제발 여자 사원을 우리 부서에 보내지 말라’는 현장부서로부터의 압력을 받는다. 업무 특성상 야근과 술자리가 많으니 여자 사원을 보내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배제는 때로는 이처럼 노골적이고 때로는 아주 은근하다. 내 짧은 직장경험을 되돌아보니, 회사에서 담배를 피우는 공간이 사실상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있는 것도, 중요한 의사결정이 3차 이상의 술자리에서 종종 결정된다는 것도, 여자직원들을 중요한 정보로부터 은근하게 배제하는 기제였다.

펜스 룰이 놓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반드시 여성동료와의 친밀한 자리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은 시인이나 안태근 검사의 성추행 사례가 보여주듯이,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남자는 백주대낮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공개적 장소에서도 여성의 몸을 거리낌 없이 더듬을 수 있다.

요컨대 펜스 룰은 해답이 아니다. 우리 남자들이 배워야 할 것은 여자들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교류하는 법이다. 여자동료의 몸을 동의 없이 만지지 않기, 여자동료에게 묻지도 않은 외모 평가를 하지 않기, 여자동료의 역할과 성취를 존중해주기. 펜스 룰 대신 이 세 가지 규칙을 출발점으로 삼아보자. 우리 남자들이 성차별주의자 대통령 밑에서 일하는 마이크 펜스를 롤모델로 삼아서야 되겠는가.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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