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하얀 밤의 와인파티
2018-03-13 (화) 12:00:00
한연선(교육학 박사 ABD)
기숙사의 작은 마루 한쪽으로는 좁고 길다란 창이 나 있었다. 기억 속의 창은 두 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 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쌓이는 눈을 보려고 창에 달린 우중충한 블라인드를 말아 올렸다. 코넬대학이 있는 곳은 일단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왠만해서는 멈추지 않았다. 그날도 땅에 쌓인 눈과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만나 세상을 다 채울 것 같은 기세였다.
그리고 그 날은 유학생들에게 가장 힘들다는 첫 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날이었다. 공부하는 이는 공부하느라 힘들었고 내조하는 이는 내조하느라 힘들었으니 우리는 작정을 하고 게으른 저녁을 즐기는 중이었다. 제설차가 눈 치우는 것을 구경하고 있을 때 벽에 걸린 낡은 전화기가 울렸다. 와인 파티에 초대한다는 전화였다. 초대라기보다는 외로운 청년들이 싸구려 와인을 잔뜩 사가지고 와서는 사방으로 사람들을 불러대는 모양이었다.
와인 파티장은 남자 넷이 사는 작은 아파트였는데 유학생 남자들의 쾌쾌한 흔적이 사방에서 발견되는 곳이다. 오늘 오후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 같은 인쇄물과 두꺼운 교과서들, 침대 위에 산같이 쌓인 외투와 가방들, 그리고 현관에 두 겹으로 쌓인 신발이 파티장의 모습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누군가 5시간 거리의 뉴욕시티에서 사다 나른 귀한 한국 과자들이 안주였다. 나는 반가운 얼굴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새벽 서너 시까지 아파트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그토록 오래 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더 어렴풋해지게 마련이지만, 눈이 세상을 이불처럼 덮어 내릴 때 우리가 나누었던 소망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 연애 상담을 해오던 청년은 짝사랑하던 그녀와 결혼했고, 피아노를 잘 치던 과학 수재는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회사에 취직했다.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성실해 보였던 이는 박사학위를 받고 엔지니어가 되었고, 아기를 기다리던 새댁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얻었다. 과연 우리는 모두 청년 때의 꿈을 이룬 것일까? 설익은 꿈의 뜨거움과 꾸준한 발걸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 물론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어 보일 때도 있다. 그럼 그때처럼 조촐한 파티를 준비해놓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로 힘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온 소망을 표지 삼아 오늘도 한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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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연선(교육학 박사 AB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