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들과의 재회

2018-03-10 (토)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 중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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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구나…. 어스름 불빛에 약속장소인 레스토랑 건물이 보이자 내 마음은 비장해졌다. 저녁 8시. 대기업에서 빡빡하게 일하느라 아들은 이렇게 느지막한 시간에 예약을 하고는 아빠를 초대한 것이었다.

그간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 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와 서성거리고 있는 큰아들이 보였다. 나는 어색한 악수를 건네며 안부를 물었다.

큰아이는 5년 만에 만나는 아빠를 기다리며 안절부절 못하다가 서먹한 순간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냥 나갈까 고민하던 중에 나와 맞닥뜨렸다고 했다. 그간 서로의 단절이 길긴 길었나 보다. 183cm 정도의 보기 좋은 키에도 몸은 야위어 보였다. 아무래도 운동부족과 흡연에 따른 식욕부진 그리고 혼자 살면서 섭생에 소홀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아비가 마음에 안 들었기로서니 죽을 때까지 연락 안하는 냉정한 아들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사실이지 이렇게 살다가 스티브 잡스의 생부처럼 죽을 때까지 자식 얼굴 못 보는 거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이유가 뭐였건 무조건 먼저 사과하리라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부모 자식 간에 잘잘못을 따져봐야 무슨 실익이 있겠는가.

벌써 서른이 된 아들은 재일교포 3세와 교제 중이라고 했다. 명문대학을 나와 일본 나고야에서 세계적 의류업체의 점장으로 일하는 여성이라고 했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라지만 거리가 그렇게 멀어서야 사랑의 결실을 맺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하는 노파심이 스쳤다.

나고야라면 우리 집안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아들의 할아버지는 중·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933년, 12살의 나이로 당시 30대 중반이던 증조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가난에 찌든 조선반도를 떠나 현해탄을 건넜었다.

오사카에 정착한 후 공장에 다니면서 주경야독 한끝에 19살이던 1940년 일본의 국민학교 교원 양성 국가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는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서 첫 부임지가 나고야였다.

약 80년 전 할아버지의 숨결이 어딘가 남아있을 나고야로 아들이 재일교포 아가씨를 만나러 갔을 때,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는 아마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셨을 것이다.

아들은 그동안 왜 그리 아빠를 멀리했는지 가슴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국에서 중학생 시절 나에게 맞은 것과,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린다고 생각했던 분당에서의 중학생활을 2학년으로 중단하고 억지로 미국에 와야 했던 것이 그렇게 가슴에 상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만히 회상해 보니 당시 나는 아이에게 손찌검을 했었다. 아이가 사춘기 때였다.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좀 싫은 소리를 하면, 아이는 심하게 반항을 해서 집안이 잠잠할 날이 없었다.

내가 눈을 부라렸을 때 그만 누그러트렸으면 좋으련만 아이는 끝까지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고, 참지 못한 나는 그만 손찌검을 했던 것이었다.

우리 세대는 부모에게 대든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이 매번 늦다보니 나는 학급종례 시간에 단골로 일어나 독촉 받는 수모를 견뎌야 했다.

항상 누이 등록금을 먼저 내기 때문이어서 단 한번만이라도 내 등록금을 먼저 내달라는 부탁을 아버지가 끝내 안 들어 주신 날, 나는 부모님 면전에서 벌떡 일어나 가출하는 불효를 저질렀다.

차가운 밤공기에 한국동란 중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스산한 소문이 도는 방공호를 지나 돈암동 산동네 길을 허기 속에 헤매다 결국 한 시간을 못 버티고 저녁 생각이 간절해 멋쩍게 돌아온 것이 부모에 대한 반항의 전부였다. 그러니 “미국이 그렇게 좋으면 아빠 혼자가라”며 억지를 쓰던 아들의 반항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모든 게 경험 없는 초보아빠여서 그랬다고 나는 진심으로 사과를 하였고, 아들은 남자답게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리는 극적인 화해를 하고 비로소 부자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후회가 많다. 이민초기 중3이던 아들이 셀폰을 사달라고 했을 때 너무 오래 뜸을 들여 낙담시킨 것, 전자영어사전을 사달라고 했을 때 금방 사주지 않고 애타게 만든 것 등….

이제와 후회해도 쏜 화살 같은 인생은 나를 50대 후반으로 몰고 왔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던 그 천금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만약 다시 한번 기회가 온다면 나는 무조건 아이가 기뻐서 어쩔 줄 모를 만한 일들을 정말 많이 해주고 싶다.

아들아, 네게 못 다한 사랑, 손주에게라도 듬뿍 전해야겠으니 어쩔 수 없다. 네가 빨리 장가를 가는 수밖에.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 중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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