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98)Douglas MacArthur 장군(②

2018-03-09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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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Arthur 는 우선 1931년 이후에는 일본의 군부가 실권을 장악해서 천황은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음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책임이 없고 모든 나쁜짓은 도조 히데끼 수상이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본 천황과 왕족들이 전범재판을 모면하도록 조치하였었다.

동경에 있던 MacArthur 의 본부에 일황 히로히도가 예방하면서 두사람이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키가 한목은 더 크고 두발을 벌린채로 거만하게 서있는 MacArthur 옆에 히로히도가 공손하게 서있는 사진이었었다. 일본의 황실과 정부에서는 이 사진이 공개 되어서는 않되는 것이라고 하였었다. 그러나 MacArthur 는 일본의 모든 신문에 이 예방사진이 계제되도록 명령하여 “두 동업자”중 어느쪽이 더 높은 사람인가를 상징적으로 일본인들에게 알려지도록 하였다.

“군정본부로 MacArthur 장군을 예방한 히로히도 일본천황”
MacArthur 는 일본의 헌법에서 시작하여 각종의 법률과 제도가 민주주의에 합당한 의회내각책임제가 되도록 하였으며 재벌들을 규제하고 여성 동등권을 주고 지주들로부터 농토를 구입하여 소작농들에 재판매 하는 농지개혁등 가히 혁명적 이라고 할만한 개혁을 시작하면서 청황의 발표를 통해서 그런조치들이 “명치유신”의 연속이라고 말하도록 하였다. 국방군 대신에 “자위대”만을 둘수 있도록 하였으며 전쟁불참조항도 헌법에 들어가도록 하였었다. 일본인들은 MacArthur 를 “외인 쇼군” 이라고 불렀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내에서 천황의 존속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만일 천황을 전범으로 처형하면 일본인 전부가 반란군이 되고 공산주의가 날뛰게 되어서 일본을 통치하자면 미군 백여만명이 앞으로 몇년이나 더 계속 주둔해야 될지 모른다고 반박 하였었다고 한다.
MacArthur는 아마 미군 장성들중에서 가장 Asia 에서 오래 근무하였고 Asia 가 미국의 장래를 위해서 Europe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주장해온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MacArthur는 반공주의자로써 공화당 보수파들의 마음에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군인으로서도 “강경파”로 분류될수 있는 인물이었던것 같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그는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된 Herbert Hoover 대통령의 재임중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1932년 불황속에 실직중이던 제대군인들이 정부에서 약속한 수당에 불만을 품고 Washington 에서 일부의 빈 정부청사를 점거하고 공원등에서 야영을 하며 대규모 시위를 하는등 크게 혼란을 이르키고 있었다. 경찰만으로서는 치안유지가 불안하다고 느낀 Hoover 대통령이 MacArthur 참모총장에게 진압을 명령하자 MacArthur 는 당시 령관장교들이 었던 Eisenhower 와 Patton 등을 출동시켜 최류탄을 발사하고 tank 까지 동원하여 강압적으로 진압한끝에 부상자들이 속출 하였었다. MacArthur 는 비무장한 민간인 시위자들에게 tank 까지 동원하였다고 미국 언론들의 강력한 규탄을 받았었고 그가 사리에 맞지않는 강경성을 보여준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었다.

MacArthur는 성질도 급했었던듯한데 Eisenhower 와는 대조적으로 화를 잘 참지를 못한 사람이었던듯하다. 그는 FDR 대통령과 Truman 대통령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였었다.
1935년에 FDR 대통령은 군비를 대폭 삭감하려고 하였다. 육군참모총장이었던 MacArthur 는 백악관으로 찾아와서 FDR 대통령에게 아주 불손한 어조로 군비축소에서 초래되는 국방문제에 대해서 훈계조로 항변을 하였었다고 한다. FDR은 MacArthur의 태도를 꾸짖고 대통령에 대한 예절을 지키라고 얘기 했었다고 한다. MacArthur 는 회담을 마치고 나오다가 정문앞의 계단에서 심하게 구토를 하였었다고 한다. 이것이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 었던지 아니면 분을 삭이지 못해서 일어난 일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언급이 없다. 원인이 무었이 었든지간에 별로 자랑스러운 기록은 아니다.

필자는 MacArthur 가 “야심가”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는 1944년, 1948년, 1952년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해 보고자 “물밑운동”을 해왔었다. 그 기간중 내내 현역군인이 었는데 1944년에는 FDR 이, 1948년에는 Truman 이, 1952년에는 Eisenhower 등이 대통령에 당선 되었었다. FDR 과 Truman 과의 관계가 좋을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후배인 Eisenhower 와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쟁관계에 들어가게되자 Eisenhower 에 대해서 별로 graceful 하지 못한 언급을 하기도 하였었다. FDR 은 그의 장군으로써의 능력을 인정해서 그를 계속 유임시켰으며 Truman 도 참을만큼은 참았었던듯 하다.

한국전쟁때에 중공은 “백만의용군”을 참전시킨다고 호언을 했었지만 MacArthur 와 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 는 7만여명이 참전했다고 추측하였었는데 사실은 30여만명이 참전했었다고 한다. 추측했었던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중공군이 참전하여 UN군이 막 몰리기 시작하자 MacArthur는 Truman에게 전쟁을 확대하여 인민군을 압록강 밖으로 쫓아내고 만주와 중국본토를 폭격하고 대만의 장개석이 본토를 침공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었다. 그는 Truman 과 미국 합참이 그가 원하는 전략을 허가하지 않자 공개적으로 Truman 대통령의 정책을 비난하기에 이르렀었다.

그때에 MacArthur 는 한국에 원자탄을 쓰자고 건의했었다고 하며 Truman 은 원자탄 9개를 보낼것까지 고려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정계와 군부에서 조차 MacArthur 에게 원자탄을 주면 실전에서 쓸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들이 많아서 원자탄을 보내지 않았었다고 Truman 이 회고록에 썼다고 한다. MacArthur 가 Truman 에게 원자탄 사용허가를 자신이 요청 했다는것을 증명하라고 하자 Truman 이 그런 사실이 있었음을 부인했다는 얘기가 있다. MacArthur 는 Truman 에 의해 1951년 1월에 해임된 이후 미국전역을 돌아 다니면서 Truman 비난 연설을 하고 다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청중이 줄어 들었었다고는 했지만 Truman 의 재출마에 많은 지장을 주었었다고 하며 한국전쟁은 계속 되었었기 때문에 Truman 의 인기가 극도로 내려가서 결국은 재출마를 포기하게 되었었다고 한다.

MacArthur 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공천이 어려웁게 되었던 이유중에 비율빈정부로부터 받은 “뇌물”사건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그의 부친이 주비율빈 미군사령관을 지낸후에 그자신도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주 비율빈 미군사령관을 지냈었고 미국의 지원으로 사실상 비율빈군을 창설하고 비율빈사관학교를 설립하는등 비율빈군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비율빈군 육군원수 계급을 부여받았었고 Garcia 비율빈 대통령으로부터 그 자신은 50만불, 그의 수하 장군들은 7만5천불, 5만불등의 bonus 를 받은적이 있는데 숨겼던 일도 아니고 불법적인 일은 아니었었다고는 하였지만 미국에서는 그 bonus 가 사실상의 뇌물 이었다고 규탄을 받았었다고 하며 그의 대통령출마설이 나올적 마다 뇌물수수건이 거론 되었었다고 한다. 그는 퇴역후에 Remington 회사의 회장으로 일하면서 정부로부터 년금으로 매년 20만불을 받아 Waldorf Astoria Hotel 의 penthouse 에서 부인과 같이 살다가 1964년에 향녕 84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Life 잡지에 한동안 연속으로 계제되었었 다는 회고록의 선불금으로 출판회사에서 지금돈으로 7백만불 정도를 받았었다고 한다.

MacArthur 장군의 장례는 John F. Kennedy 대통령이 사전에 명령해 놓은것을 Lyndon B. Johnson 대통령이 허가함으로써 국장으로 치루워 졌었다고 한다. MacArthur 는 그의 유언대로 자신의 모친이 출생하고 성장했던 Virginia 주의 Norfolk 에 있는 부모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고 그곳에 MacArthur 기념관이 있다고 한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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