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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외투

2018-03-09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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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외투
오랫만에 고골리의 ‘외투’를 다시 읽게 되었다. 날씨가 영향을 미쳤을까, 아니 그저 마음 속에 잠깐 깃들다 사라진 겨울 보내기가 아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읽은 ‘외투’는 기억 속에서 보다도 훨씬 더 ‘외투’ 다웠다. 이 이야기는 한글에 눈을 뜬 초등학교시절 부터, 만화책으로 읽어본 뒤 그 후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차례 감명을 받았던 작품이었다. 마치 영혼의 외투를 뒤집어 쓰고 겨울이 주는 그런 실내적인 분위기 속에서 밤새도록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라고나할까.

‘외투’는 시니컬한 문장, 풍자적인 맛, 리얼리스틱한 시대적인 요소까지 가미되어 마치 어딘가에서 실제적으로 발생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사실감을 주는 작품이다. 물론 ‘외투’가 아무리 훌륭하다해도 정장을 피하는 나에겐 무용지물이겠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도 나에게는 아무래도 (외형이든 내면이든) 멋을 아는 패션 감각이랄까, 특별한 어떤 시적 감각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 설혹 멋을 안다해도 옷걸이가 시원찮으니 그 또한 불만은 없지만 외모가 후지더라도 옷이 날개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옷은 따로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문학이든 옷이든 짝사랑의 그 닿을 수 없는 세계를… 선녀처럼 날아오를 수 있는 매직이란 아무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생에 단 한번, 옷라는 것을 한번 맞춰 입어 본 적이 있었다. 그 때만해도 한국에선 옷을 맞춰입는 것이 유행이었다. 형따라서 난생처음 양복점이란 곳엘 갔었다. 이런 저런 옷감들이 벽면 한쪽 가득, 층층히 쌓여 있었는데 정말 어떤 것을 골라야할지… 난망했었다. 그중 가장 시원하고 멋져보이는 물방울 무늬를 골라 T 셔츠를 맞춰입었는데 그게 그만 뱀의 옷이었는지… 사람의 옷이었는지… 무늬만 봤을 때의 옷감과 옷으로 변했을 때의 옷감이 다른 것을 그 때 알았다. 그 때 이후 옷에 대한 기대감이랄까, 옷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이란 생각을 접었다.


물론 사람마다 각자의 패션 감각이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이 있기 마련이기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 어떤 종류 옷과 스타일은 그 사람의 내면까지 비쳐 보이게 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나의 경우 밤색 가다마이(양복 상의를 그땐 가다마이라 불렀다)가 얼추 자신의 약점을 어느 정도 커버하는, 그런대로 어울리는 스타일의 하나였던 것 같다. 예전에 형이 물려준 밤색 가다마이를 좋아해 미국에 올 때에도 가지고 와서 입은 적이 있었는데 어느 추운 겨울날, 가다마이만 걸치고 맨 차림으로 외출했다가 감기에 걸려 크게 고생한 적도 있었다.

글쓰기란 왠지 (나에겐) 그 때의 밤색 가다마이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입어볼래? 형이 던져준 옷이 어쩌다 나에게 딱 맞았고 또 입고 보니 웬지 폼도 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자기 것인 줄 착각하게 되었고 때론 오버하게 되고 또 그러다보니 감기에 걸려 고생할 때도 많았다. 솔직히 글쓰는 일은 쉽지않다. 아니 쉬워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더욱이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글 쓴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다. 그저 저 홀로 좋아서 어울리지 않는 외투를 입고 밤거리를 걷는 허영이랄까, 낭만이랄까… 어쩌면 고독이랄 수도 있는 그런 아름다움을 찾아… 잡히지않는 환영을 찾아 헤매는 나는 아마도 미아일까… 이상의 시처럼, 울창한 산림을 진종일 헤메고도 단 한 개의 나무 인상도 훔쳐오지 못한 환각의 人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글쓰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고골리의 ‘외투’, 그리고 도스또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읽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소설이 꼭 어떤 가난이라든가 애환이 묻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소설 스타일로서 나는 사실 톨스토이나 핏츠제럴드 류의 작품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재능이 허락한다면 그런 류의 빛나는 문장력을 과시하고 싶지만 사실 글이란 머리에서 보다는 가슴에서 우러나올 때 더 감동적이란 생각에는 변함없다.

고골리의 ‘외투’는 러시아의 시대상을 대변하고 있는 이야기이며 평범하고도 가난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평범하다는 것, 아니 가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색다른 것… 특별한 것을 꿈꾸는 것이겠지만 아까끼 아까끼에비치는 9등 서기관으로서 자신의 격에 맞지않은 외투를 꿈꾼 것이 죄였고 불행이었다.

평범한 꿈 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을 경우 큰 불행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이 (어쩌면)이야기의 줄거리겠지만 문제는 그의 불행이 자신에 맞지 않은 옷 때문이 아니라 그 꿈이 너무나 애절했고 또 힘없는 자에게 현실이란 언제나 잔인할 수 밖에 없다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서민적인 운명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문학으로서 읽는 재미와 가슴에 와 닿는 감동으로서, 문학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정상적인 성실성이 인정받지 못하고 현실이란 늘 성실하고 착할 수록 조롱받고 멸시받는다는 것이 ‘외투’의 비애이기도 했다.

관료주의의 썩은 세태, 서민들의 애환을 심층있게 그려내어 도스또엡스키의 ‘가난한 사람들’ 을 비롯 서민적 사실주의(문학)의 풍향계 역할을 했으며, 지금도 우리에게 문학이라는 따뜻한 외투로 감싸주는 세기의 명작이기도 하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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