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상한 자의 설움

2018-03-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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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하트는 한 때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다. 1984년 민주당 경선에서 월터 먼데일에게 아깝게 지기는 했으나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로 떠올랐고 1988년 대선을 앞두고는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그를 일거에 무너뜨린 것은 도나 라이스 스캔들이었다. 1987년 워싱턴포스트가 바람둥이냐고 질문하자 “남을 짓밟는 사람은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고 답했고 뉴욕타임스가 바람둥이라는 소문에 대해 묻자 “나를 따라 다녀 봐라. 나는 상관 없다. 내 뒤를 밟아 봐도 지루하기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뒤를 따라다닌 기자들에게 캠페인 보좌관이었던 도나 라이스와 주말 내내 한 집에 있었던 사실이 폭로되자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 해 12월 다시 재출마를 선언했으나 등을 돌린 여론을 되돌리기는 역부족이었고 이와 함께 그의 정치 인생도 끝났다.


한 때 유력 대권 주자로 손꼽히던 엘리엇 스피처 뉴욕 주지사의 인생 역정도 비슷하다. 뉴욕 검찰총장을 지내면서 부패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법집행자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고급 창녀들과 상습적으로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주지사 직에서 물러났고 정치적 생을 마감했다.

2008년 3월 뉴욕타임스는 스피처가 엠퍼러 클럽 VIP라는 고급 콜걸 서비스 소속 여성들과 시간당 1,000달러를 주고 성관계를 맺었다고 보도했다. 수사 당국은 처음 그의 구좌에서 수상한 돈의 흐름을 발견하고 이를 뇌물로로 파악, 도청을 해왔는데 그 결과 스피처가 주지사로 있으면서 6개월간 최소 7~8명의 여성에게 1만5,000달러를 지급한 것을 알아냈다. 스피처는 검찰총장 시절부터 이들 여성들과 관계를 맺어왔으며 총 8만 달러가 넘는 돈을 쓴 것으로 집계 됐다.

깨끗한 인상의 정치인이 섹스 스캔들에 말려들면 한 방에 가지만 처음부터 그려려니 한 인물들은 스캔들이 터져도 별 영향이 없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빌 클린턴이다. 그는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제니퍼 플라워스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과의 불륜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원래 그런 인간으로 치부돼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됐다.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로 탄핵 직전까지 갔었지만 끝내 대통령 직을 지킨 것은 원래 바람둥이였다는 평소 쌓아둔 이미지 덕이 컸다.

선거 전 10여명이 여성들이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기자 회견까지 했는데도 가주 지사가 된 아놀드 슈워네제거나 역시 10여명의 여성들로부터 성추행 사실을 고발당하고도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도 비슷한 케이스다. 원래 행실이 지저분한 것으로 정평이 있었기에 그 정도 스캔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트럼프는 이번 주 13만 달러를 주고 입을 막은 포르노 여배우로부터 소송까지 당했는데도 미 조야는 덤덤한 표정이다. 미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포르노 배우에게 소송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듯 싶다.

한국의 ‘미투’ 운동이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손꼽히던 안희정 충남지사를 한번에 날려 버렸다. 참신하고 깨끗한 차세대 정치인으로 주목받던 그가 자신의 보좌관을 수차례 성폭행하면서도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이 사람들에게 더 큰 분노와 실망을 안겨줬다. 그는 피해자의 폭로 인터뷰가 있은 지 불과 5시간만에 이를 인정하고 지사직을 사퇴했으며 더불어민주당은 다음 날 바로 그를 제명했다. 놀라운 신속성이 아닐 수 없다. 고상한 것처럼 보이는 정치인일수록 한 방에 훅 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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