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끄러움은 가해자의 몫

2018-03-05 (월)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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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은 가해자의 몫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터질 것이 터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성폭력 고발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SNS를 통해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인 미투 운동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그동안 곪아 있던 우리 사회의 추악한 단면이 드러나고 있다.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 제작자를 시작으로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번 거론되던 노시인도, 연극계의 대부라고 칭송받던 사람도, 딸 바보로 소문난 중년배우도, 영화에서 감초 같은 역할로 사랑받던 배우도 본인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여성 스탭들, 후배와 제자들을 성추행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소위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이 뒤로는 짐승 같은 짓을 일삼으면서 대중들을 기만한 것이다. 그들의 작품을 사랑하고 아꼈던 많은 이들이 큰 배신감을 느꼈다.

이렇게 매일 터지는 사건들을 봤을 때 유명인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속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실로 아프고 병든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피해자들이 그런 일을 당한 것이 본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야한 옷을 입어서, 단호히 거절하거나 제지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도 피해자들이 입을 다문 이유였다. 한국의 현행법상 허위 사실이 아닌 사실을 폭로해도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악용하여 가해자들은 잘못을 뉘우치기보다 사건을 은폐 축소하고, 어렵게 용기를 낸 피해자를 오히려 맞고소한다.

얼마 전 검찰 내 성추행 사건을 고발한 한 검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성폭력 피해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절도 범죄의 경우 도둑질을 한 도둑을 욕하지 아무도 피해자에게 왜 물건 관리를 소홀히 했느냐고 추궁하지 않는다. 유독 성범죄의 경우만 가해자의 범죄 사실에 집중하지 않고 피해자의 행실을 비난하고 심한 경우 피해자를 소위 ‘꽃뱀’으로 프레임화한다.

지난주 내내 포털 사이트에서는 미투 캠페인에 실명으로 동참했던 피해자들의 이름이 검색순위 1위를 차지했다. 사람들은 가해자만큼이나 피해자를 궁금해 했다. 피해자들의 평소 성향이나 생김새 등을 살펴 ‘당할 만하다’라고 악플을 달기도 하고 ‘왜 더 조심하지 않았느냐’라고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이 모두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일이다.

잘못했다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일도,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도 모두 가해자의 몫이다.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줄 알아야 참된 인간이라는 말이다. 모범을 보여야할 공인들이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보는 이가 더 부끄러울 지경이다.

미국에서는 미투 운동이 전방위로 확산되자 기업의 성범죄 예방 교육 문의가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추행 건으로 변호사의 자문을 구하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회식이 잦은 한인 회사에서도 조심 또 조심하는 분위기다.

미투 운동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여러 안타까운 사연들에 같은 여자로서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한층 더 성숙할 수 있다고 믿는다. 털어낼 것이 있다면 다 털어내고 곪은 곳은 치유해야 한다. 미투 운동의 동참한 이들의 용기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그들의 어려운 고백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지지와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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