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외할머니의 솜씨

2018-02-27 (화) 12:00:00 한연선(교육학 박사 A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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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성큼 들어섰다. 따뜻한가 싶더니 다시 쌩하니 찬바람이 분다. 봄이 되면 변화무쌍한 봄 날씨를 빙자해 나도 새로운 것 한두가지쯤 해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간 지겨웠던 플라스틱 블라인드를 모두 커튼으로 바꾸기로 했다. 주문한 커튼을 창문에 대어 보니 많이 길다. 수선집에 들러 견적을 내었더니 패널 하나당 26달러를 불렀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고시랑거리며 내가 직접 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와 바느질함을 꺼냈다. 시집올 때 어머니가 무형문화재 가게에서 주문해 주신 것이다. 진한 고동색 바탕에 백년해로와 무병장수를 기리는 자수 길이 빙 둘러져 있다. 안에는 색색깔의 화려한 실꾸러미, 골무, 바늘꽂이와 반짝이는 바늘세트 등이 가득하다. 바느질에 별 관심이 없어 미싱도 없다 보니 믿을 건 이것뿐이다. 커튼 색에 맞춰 실을 고르고 바느질을 시작했다. 바늘이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지나가면 단이 고정된다. 신통방통하다.

사실, 바느질하면 우리 외할머니인데! 외할머니는 어머니와 이모들의 옷이며 이불을 직접 지어주셨다. 그래서 우리집에는 외할머니가 지어주신 비단 이불들이 많았다. 어머니는 늘 그 이불들을 소중하게 다루셨다. 초록색, 진달래색 혹은 황금색 바탕에 학과 꽃, 소나무, 거북이, 구름 등이 수놓여 있고 가장자리로는 풀을 먹여 빳빳하고 하얀 이불보가 둘려 있었다. 그때는 이불을 이불보로 감싸고 그 가운데 비단이나 고운 천을 대어 꾸몄는데, 이불 빨래를 하려면 이것들을 일일이 다 뜯어내어 빤 후 다시 바느질로 고정해야 했다. 어머니는 번거로웠겠으나 나는 이부자리 바느질이 시작되면 단숨에 달려가 그 위로 몸을 던졌다. 줄 맞춰 꽂아 놓은 시침핀에 찔리지 않도록 주의를 주셔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비단 위에 누워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면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고 행복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바느질을 할 때면 비단 이불과 내 어머니의 손길, 그리고 외할머니의 솜씨가 늘 함께 기억이 난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해도 결국 커튼 줄이기를 완성했다. 외할머니가 보셨다면 칭찬해 주셨을까? 사실 내게 외할머니의 뛰어난 솜씨가 유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잘하면 잘하는 대로 서툴면 서툰 대로 용기를 내어 새로운 일을 해냈다는 것 하나는 칭찬감이다 생각하니 창 곁에서 살랑이는 커튼이 더욱 뿌듯하다.

<한연선(교육학 박사 A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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