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 여선생과 사우디군인 학생

2018-02-19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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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선생과 사우디군인 학생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1월 첫 주, 대학부설 어학연수기관 디렉터가 나를 불렀다. 내가 다른 일정이 있어서 아침시간 수업을 맡기 어렵다고 하니 오후 시간 문법수업을 맡겼다.

“학생은 전부 사우디아라비아 해군들이야. 어학연수생이 대부분인 다른 반이랑은 좀 달라. 미국해군과 의사소통을 해야 하니까 이 프로그램을 듣는 건데, 프로그램 중간에 있는 영어시험을 통과 못하면 짐 싸서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네. 그러니까 수업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시험성적이 중요한 거지, 이 학생들한텐.”

사우디아라비아라니, 여성은 아바야와 니캅을 입지 않으면 밖에 나갈 수도 없고, 남성 보호자 없이는 외출도 자유롭게 못하고, 여성 운전도 최근에야 합법화된 나라 아닌가! 게다가 전부 군인이라니! 선생 혼자만 동양인 여자라니! 수업과 별개로 다른 시험이 있고 시험에 맞춰서 가르쳐야 한다니!


눈앞이 깜깜해졌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고, 예의상 미소를 계속 얼굴에 장착한 채 무너져 가는 마음을 추슬렀다. 회의실 밖을 나오자마자 걱정이 태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여선생인 나를 색안경 끼고 보는 거 아닌지, 군인들이니까 군기 든 모습으로 수업을 듣는 건 아닌지. 게다가 시험성적이 중요하다면 내 수업을 맘대로 못 짜고 시험에 맞춰서 가르쳐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나 처음 수업에 들어가자마자 깨달았다. 색안경을 다섯 겹씩 쓰고 있었던 건 바로 나였구나 하는 사실이었다. 전원이 남학생이긴 했지만 아무도 여선생인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고, 말해주지 않으면 군인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자유로운 학생들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게 친절하고 활발하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서로 주먹을 마주치면서 인사를 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한 학생이 안늬엉하쒜요! 라고 발음이 생소한 한국어로 인사하고는, 서울에서 몇 달 간 지내다 온 경험을 더듬더듬 단어와 단어를 이어가며 이야기해줬다.

아랍어로 안녕하세요가 뭐더라, 순간 내 무지가 부끄러웠다. 내 색안경을 몰래 떼어내 마음속에서 쾅쾅 짓밟아 모두 깨 버렸다. 배경지식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지식을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정당화하는데 쓰면 안 되는 법이다. 항상 유념하고 있어도 실천은 어려운 법이다.

첫날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한 후에, 종이를 나눠주고 “문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라는 질문에 그림으로 답해보게 했다. 하나하나 기초부터 쌓아가야 하기 때문에 문법은 건물 쌓기와 비슷하다고 한 학생도 있었고, 더 높은 고지에 닿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사다리 같다고 한 학생도 있었다. 문법에 맞는 문장을 쓰려면 3인칭 단수, 복수, 주어, 동사 같은 걸 한번에 함께 생각해야 하니까 막히는 4차선 도로에서 운전하는 것 같다고 한 학생의 답변도 인상 깊었다.

8,000Km 떨어진 나라에서 각자의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제3국 교실 한 군데에서 만나게 됐다. 아직 이 학생들은 problem의 스펠링을 적는 것도 어려워하고, 열 단어 이상의 문장을 쓰려면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메시, 호날두, 네이마르 등 유명한 축구선수를 두고 누가 잘 하는지 비교급과 최상급을 써서 말해보라고 하면 거의 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열띤 대화를 이어간다. 이번 학기는 내 좁은 세계를 열어젖히고, 학생들의 문법 세계에서 길잡이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학생들이 문법이라는 건물을 쌓아올리고, 문법 사다리를 한 단계씩 올라가고, 4차선 도로에서 문법을 자동차 삼아 쌩쌩 달릴 수 있도록.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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