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른들은 뭘 하고 있는 가”

2018-02-17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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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인근 오로라에는 그렉 재니스(66)라는 목수가 살고 있다. 살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사는 날은 많지 않다. 타지로 떠도는 날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을 예로 들면 10월초부터 5주 사이 라스베가스, 뉴욕, 텍사스의 서덜랜드 스프링스를 지그재그로 쫓아다녔다. 그냥 몸만 간 것이 아니다. 하얀 나무 십자가들을 만들어 픽업트럭에 싣고 수천마일씩 운전해서 갔다. 모두 대량살상 사건이 일어난 곳들이다.

10월5일 라스베가스 총기난사사건으로 58명이 죽었고, 10월31일 뉴욕 맨해턴 트럭테러로 8명이 죽었으며, 11월5일 텍사스 교회 총기난사사건으로 26명이 죽었다. 미치광이들의 총기난사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위해 나무 십자가를 직접 만들어 참사현장에 세우고 추모하는 것을 그는 남은 생애의 사명으로 삼고 있다.


문제는 그가 따라잡기 벅찰 정도로 총기난사 사건들이 점점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번 주 그는 또 바빠졌다. 플로리다로 가져갈 17개의 나무 십자가를 지금 그는 정성들여 만들고 있을 것이다.

학교가 또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베트남 전 당시 밀림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M16과 동종의 AR-15 반자동소총이 학교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지난 14일 플로리다, 파크랜드의 더글러스 고교는 총성과 총탄으로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바뀌었다. 아침에 ‘밸런타인스 데이!’라며 즐겁게 등교했던 학생들 중 17명은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근 20명은 부상했으며, 다른 수많은 학생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 간 아이들이 주검으로 돌아온다면 이건 누가 봐도 잘못된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비정상을 정상으로 받아들일 건가, 정치인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 학부모들은 절규했다. 그리고 여동생의 친구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12학년 학생 데이빗 호그(17)가 CNN 카메라 앞에서 한 말은 두고두고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입니다, 당신들은 어른입니다. (어른이라면) 뭔가 조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함께 협력해서, 정치는 뒤로 하고, 제발 뭔가를 하십시오.”

미국은 여러 면에서 세계 1위이지만 확실하게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한 가지가 있다. 총이다. 전 세계 총의 42%가 미국에 있다. 총 3억정 정도로 거의 일인당 한정 꼴이다. 총이 많다는 것은 총으로 죽을 위험이 높다는 것. 평균 15분에 한명이 총기로 자살하거나 살해된다.

그렇다 해도 총기로부터 절대 안전해야 할 곳이 학교인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지난 2012년 12월 미국은 샌디훅 초등학교 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았었다. 기저귀 뗀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어린 생명들이 20명이나 무참히 살해되는 광경을 보면서 ‘더 이상은 안된다. 뭔가 해야 한다’고 결의를 다졌었다.

하지만 그때뿐, 이후 5년여가 지나는 동안 거의 300건의 학교 총기난사 사건이 이어졌다. 평균 일주일에 한건 꼴이다. 2018년 새해 들어서는 이번 플로리다 사건이 18번째로 60시간마다 한건 꼴이다. 돌아서면 한건씩 터지니 교내의 총성은 ‘새로운 정상’이 되고 있다.


학교 총기난사사건이 증가하는 원인은 복잡하다. 너무 많이 나도는 총기, 이를 규제 못하게 막는 전국총기협회의 로비, 치료받지 못하고 방치된 정신질환 등이 대표적 원인들로 꼽힌다. 사건 터질 때마다 민주당은 ‘총기’를 탓하고, 총기협회 눈치를 보는 공화당은 ‘정신질환’을 탓하다가 흐지부지 되면서 이제까지 왔다. 그 사이 학교는 툭하면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무서운 곳이 되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이게 나라냐’이다.

은퇴 목수 재니스는 1996년 장인이 총격 살해된 후 십자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베스트 프렌드’였던 장인의 죽음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6개월 사이 몸무게가 50파운드나 빠질 정도였다. 그때 그는 장인을 위해 십자가를 만들며 슬픔을 삭였다.

그리고는 얼마 후 6살짜리 소년이 갱들의 총격전 중 날아든 총탄에 맞아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십자가를 만들었다. 이후 20년 간 그가 만든 십자가는 대략 2만개. 그만 만들어도 되면 좋으련만 그는 점점 더 바빠지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두려운 나라에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놓고 부모가 가슴 졸이는 나라에 어떤 미래가 있겠는가. 플로리다 학생의 말대로 어른이라면 뭔가를 해야 한다.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 해야 한다. 정치인들의 단골 레퍼토리 ‘기도와 애도’는 이제 사절이다. 그들이 할 일은 기도하고 애도하는 일이 아니다. 누구나 이해할 상식적인 총기규제법을 제정해야 한다.

총이 아무리 널려 있어도 행복한 아이들은 무차별 총질을 하지 않는다. 상처 속에 자라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그 아이들을 보듬을 책임이 어른들에게 있다. 가정과 학교의 몫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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