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을 알아가는 재미

2018-02-17 (토) 한수민 /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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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30여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미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게 된 몇 가지 사소한 일화가 있다. 아마 처음으로 코인 론드리에 빨래를 하러갔을 때였던 것 같다. 지금은 한국에도 ‘빨래방’이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내게는 새로운 체험이었다.

조심조심 머신에 그려진 대로 1달러짜리 지폐를 넣어 동전을 바꾸고 설명대로 작동시켰건만 중간에 덜컥 머신이 서버린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관리인을 부르면서 혹시라도 “네가 뭘 잘못만진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까봐 지레 방어할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듭 친절한 사과와 함께 환불해 주었다. “아, 미국사람들은 각박하지 않고 여유가 있구나”하는 좋은 인상을 심어준 첫 번째 일화이다.

그 시절 내가 다니던 직장에는 소위 서류미비자들이 몇 명 있었다. 나는 어느 날 친해진 직장 동료에게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여기는 이민국 직원들이 들이닥쳐 단속하는 일은 없나요?” 그는 내 질문에 박장대소를 하며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미국은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니까요” 라고 말했다. “아, 그렇구나. 미국은 인권을 존중해서 마구잡이식 단속 같은 것은 안하는 나라로구나…”


길에 늘어선 전경들이 아무나 잡아 검문검색을 하던 나라에서 온 내게는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후 30년은 아마 점차 미국을 알아가는 세월이었던 것 같다. 다양한 민족이 살아가는 대도시 한 복판에서 “(영화에서 보던) ‘진짜 미국사람들’은 어디 갔나?” 의아해 하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보장되었던 출산 유급휴가가 미국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적어도 당시의 직장에는 적용이 안 되었다. 1993년 통과된 연방법 FMLA는 50명 이상 직원을 가진 회사에만 해당되고, 최고 12주까지의 무급휴직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보호장치였다)에 경악하기도 했다.

그 사이 내가 떠나온 한국은 압축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이제는 ‘재미동포’를 은근히 딱하게 보는 시선마저 생겨났음을 피부로 느낀다. 미국에서 왔다고 하면 으레 “고생이 많으시죠” 라는 인사가 따라붙거나, “이제 한국도 살기 좋은데 들어와 사시는 것은 어떠세요?’ 라고 묻는 이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적당히 현실적인 이유를 둘러댔지만, 사실 속으로는 “미국에 사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요. 미국사회에는 아직 한국이 따라올 수 없는 덕목들이 있거든요” 라는 생각을 했다.

예컨대 미국에서 모든 인종차별 행위가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인종 다문화에 대해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려는 사회적인 합의는 분명해 보였다. 아직도 ‘정직’이 최선의 가치로 여겨지는 사회이며, 정부의 거버넌스 시스템이 비교적 투명하고 견제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미국은 국제적 리더로서 마땅히 지녀야할 도덕적 책무를 어느 정도는 실현해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미국이 내비치는 얼굴은 최소한의 품격과 도덕성도 갖추지 못한 야비한 맨얼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초로 전국민의 의료보험 가입을 시도한 오마바케어를 무력화시키고 차세대 미국의 인적자원이 될 80만 청년들의 꿈을 짓밟아 버렸다. 부자들을 위한 감세를 단행하고, 서류미비자들에 대한 무차별적 단속을 거부한 이른바 ‘피난처 도시’들에 대해 연방지원금 중단하겠다고 협박했다. 게다가 “기후 변화는 날조된 것”이라 주장하며 파리 기후변화 협정도 깨버리는 등 국제사회의 리더로서의 역할도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렸다.

그런 그가 요즘처럼 중요한 시점에 한반도 남북문제의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국내 문제 전환용으로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이용할 지, 어떤 수완을 발휘해 군산복합체의 이익에 기여할지 도통 불안하기만 하다. 평창 올림픽 단일팀 입장식에서 보여 준 펜스 부통령의 외교적 결례는 트럼프 행정부의 오만한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낸 한 사례에 불과하다.

역사에 진보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반동의 시기도 있었다는 사실로 위로해 보려 하지만, 요즘에는 미국을 알아가는 재미,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자긍심을 잃어버렸다.

<한수민 /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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