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투’ 한반도에 상륙하다

2018-02-03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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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압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조직논리” “폐쇄적 조직문화” “상명하복의 조직문화”에 억눌려왔던 검찰 내 성추행 문제가 비로소 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한 신문 사설은 지적했다. 현직 여검사가 검찰 고위간부에게 성추행 당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한국은 지금 ‘#미투’ 회오리를 맞고 있다. 며칠 후로 다가온 평창 올림픽, 남북 단일팀과 한반도기를 둘러싼 찬반 여론, 전직 대통령 비리 여부 수사 등으로 뉴스가 넘쳐나는 이 때에 느닷없이 성추행, 성폭력 규탄 열풍이 몰아쳤다. 오랜 세월 잠복해 있던 문제가 화산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다.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라는 전도서 구절이 떠오른다.

위의 신문 사설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조직의 논리나 문화가 ‘강압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며 폐쇄적이고 상명하복’이 아닌 분야가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조직의 상부에 있는 남성이 여성 부하 직원에게 성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문제와 관련, 모든 조직은 기본적으로 강압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며 폐쇄적이다.


혹시 어느 낯선 곳에 예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리웃이 그러하고 백악관이 그러하며 정계, 언론계, 재계, 스포츠, 음악계, 비영리단체 등 각 분야에서 공히 같은 문제들이 오랜 세월 깊게 뿌리박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최근 질리도록 확인하고 있다. 지난 10월 초 할리웃의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이 테이프를 끊은 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미투’의 물결은 대외적으로 존경받던 많은 인물들을 추락시켰다. 조직의 내부에서 본 그들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난 연말 미국의 ‘미투’ 물결은 새해가 되자 한반도에 상륙했다. 창원지검 통영지청 소속 서지현 검사가 검찰청 내부 전산망에 ‘나는 소망합니다’라는 글을 올리면서, 할리웃의 남의 일 같던 ‘미투’는 한국에 도착해 ‘우리의 일’이 되었다.

서 검사는 지난 2010년 한 장례식장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이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가 오히려 조직에서 찍혀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면서 “미투 운동이 전 세상을 울리는 큰 경종이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 더는 침묵하지 않고 스스로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이룰 수 있는 작은 발걸음이라도 된다면 하는 소망으로” 글을 쓴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조직 내 성추행 성폭력 문제가 주목받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6년에는 유명 시인, 소설가들이 성추문에 연루돼 문단이 시끄러웠고, 지난 연말에는 가구업체 한샘의 사내 성추문 성폭력 사건이 폭로되면서 진실공방에 휘말렸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유사 피해자들의 폭로와 격려가 이어졌을 뿐 그 이상을 넘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달라 보인다. 성추행 피해 폭로 여성들이 사회적 엘리트 계층이라는 사실, 그들이 익명의 장막 뒤에 숨지 않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는 사실이 주는 파급력이 예사롭지 않다. 서 검사에 이어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효경 경기도의원, 남정숙 전 성균관대 교수, 임보영 전직 경찰관 등이 ‘미투’를 앞세우며 폭로 대열의 전면에 나섰다.
이번 ‘미투’ 물결에는 또 아시아나 여승무원들이 특히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불편한 ‘의식’이 있었다. 매달 방문하는 그룹회장 환영식이다. 회장이 방문하는 날이면 여승무원들은 모두 로비에 나가 일렬로 서서 손뼉을 치며 맞이하고, ‘기 받으려 왔다’는 70대 회장에게 안기고 팔짱을 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해야 했다고 폭로했다. 이들은 고용노동부에 성희롱 민원제기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갑을 관계의 연속 속에 살아간다. 여기에서 갑이었다가 돌아서면 을이 되는 일에 우리는 익숙하다. 그중 가장 보편적인 갑을 관계를 꼽자면 남성과 여성의 관계이다. 어느 민족 어느 문화권이나 남성우월주의가 수천년을 지배했다. ‘남녀평등’은 불과 몇 십년 전에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다. 직장 내 성추행은 이 새로운 개념에 적응하지 못한 정신적 지진아들의 갑질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여성은 후발주자로서 직급이 낮으니 ‘을’이고, 남성중심 문화 속에서 여성이니 또 ‘을’이다. 이중의 ‘을’인 약자의 약점을 동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조직 내 성추행 성폭력이고, 조직의 질서를 앞세워 사건을 가해자 편에서 감싸 준 것이 이제까지의 조직문화였다. 피해 여성들은 단지 피해당했다는 사실로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그들 얼굴 없는 수많은 여성의 가슴 속에 억눌려있던 분노, 억울함, 좌절감이 언제부터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어서 비등점을 넘어 폭발하고 있다. 때가 이른 것이다. 잠잠할 때가 지나고 말할 때가 온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진화해왔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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