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악동 아버지의 화려한 귀환

2018-02-02 (금) 12:00:00 김미라(버클리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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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월이면 엄마는 아버지를 업고 우리집에 오신다.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하지만 이맘 때면 위풍당당 귀환하시는 악동 아버지. 엄마는 미시건에 사신다. 1월이면 폭설에 추운 날씨인 그곳을 피해 따스한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신다. 이때마다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다. 유별나게 모난 성격에 폭력적이기까지 했던 아버지는 어김없이 1월이면 우리집 새해 손님으로 오신다. 그것도 엄마 등에 업혀서 말이다.

우린 딸 넷, 아들 셋 칠남매다. 그 시절 흔히 있던 아이들 수지만 꼬장쟁이 아버지에 주눅 들은 엄마 사이에 칠남매였다. 난 아버지가 싫었다. 때론 아버지 없는 사람이 부럽기까지 했다. 온화한 엄마 덕에 아버지가 없을 때엔 웃음꽃이 만발하다 아버지만 오시면 얼음. 아버지 없는 천국과 아버지 있는 지옥, 최상의 엄마와 최악의 아버지… 그 덕분인지 요즈음 우리 형제가 모이는 날이면 이야기거리가 참 많다, 유별났던 악동씨 덕에 말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언니들과 나는 웃음보가 터졌다. 이유없이 얼굴만 보면 웃음이 났다. 아버지는 화를 내며 추운 겨울 우리를 밖으로 쫓아냈다. 지지배들이 쓸데없이 웃는다는 죄로 한겨울 내복바람 네 여자가 추위에 떨어야 했다.


아버지는 운수업을 오랫동안 하셨다. 사업상도 있거니와 좋아하는 술로 늦은 귀가가 잦은데도 당신 귀가 전에 우리가 자면 안되었다. 혹시 자다 깨어 눈동자가 빨갛다간 밤새 벌을 서야 했다. 감히 가장이 들어오기 전에 자식이 먼저 자면 안된다는 가부장적 사고 때문이었다. 엄마의 고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녁밥을 세번씩이나 했던 일, 음식할 때 말하지 못하게 하다 나중엔 마스크를 착용하게 하셨다. 아버지는 늘 독상만 고집했다. 식구들과도 물론 따로였다. 하물며 신발장에 신발도 단독 보관을 좋아했다. 당신은 가장이니까.

내달이면 악동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 새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5형제의 막내였던 아버지는 생모를 2살때 여의고 새어머니 손에서 자라셨다. 서당 선생이던 깐깐하신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리고 형들 사이에서 자랐을 아버지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아,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 아버지도 사랑받고 싶었구나. 오늘밤 꿈에라도 뵙는다면 꼬옥 안아드리고 싶다. 설마 마스크 쓰라 하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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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라씨는 58년 개띠 해에 칠남매의 넷째 딸로 대전에서 태어났다. 2000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5년 전부터 버클리 문학회원으로 활동중이다.

<김미라(버클리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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