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푸른 호수와 붉은 호수

2018-01-27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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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접경, 볼리비아의 고원지대에는 신비한 호수가 있다. 물 색깔이 붉은 호수이다. 수심이 1미터 남짓한 염분 호수인데, 소금 성분의 물속에 붉은 색 조류가 퍼져있고 철분 등 광물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해발 4,000미터의 황량한 고지에서 갑자기 타는 듯 붉은 호수를 마주하면 여행객들은 그 초현실적인 풍경에 순간 어느 낯선 행성에 도착한 듯한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강)물은 푸르다’는 것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알아온 우리에게 누군가 ‘호수는 붉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20년 쯤 전의 우리라면 ‘흠 ~‘ 하고 생각을 좀 해보았을 것이다. 말한 상대방에 따라서 ‘독특한 시적 감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정신이 좀 이상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매사가 인스턴트인 지금 시대에 나올 법한 반응은 ‘가짜 뉴스!’이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가짜’라고 믿는 ‘푸른 물’ 확신 진영과 소수의 ‘붉은 물’ 옹호 진영이 갈려서 이전투구를 할 법도 하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보는 것만 200% 믿으며, 같은 것을 보는 사람들끼리만 신뢰하는 시대이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같이 보고 공유할 수 있는 정보홍수의 시대가 각자 자기 입맛에 맞는 정보만 편식하는 편 가르기의 시대를 몰고 왔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정보의 민주화는 뜻밖에도 맹목의 우민화라는 부작용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저마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경멸하니 갈등은 심하고 분열은 깊다.

한국도 미국도 조용할 날이 없다. 평창동계 올림픽이라는 큰 행사를 앞둔 한국은 ‘평화 올림픽’이냐 ‘평양 올림픽’이냐를 놓고 문재인 대통령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대립이 첨예하고,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으며 ‘한 나라, 두 국민’ 현실에 대한 우려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

트럼프가 1년 간 이루어낸 가장 탁월한 성과로 타협의 여지없는 확고한 분열을 꼽는 의견들이 있을 정도이다. 내 편 네 편 가르기에 주저함이 없는 트럼프의 충동적이고 과격한 언행은 지지와 반대를 극한으로 몰고 가면서 중간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은퇴 후 정계와 거리를 두어온 오바마 전 대통령이 최근 데이빗 레터맨과 인터뷰를 했다. 오랜 만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사회의 큰 문제로 어떤 사실들에 대해 누구나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준선이 너무 부실하다고 지적했다. 국민들이 둘로 갈라져 전혀 다른 정보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팍스 뉴스를 보는 사람은 CNN 뉴스를 보는 사람과 정신적으로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

지난 2008년 선거에서 조직도 자금도 열세인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막 보편화한 테크놀로지 덕분이었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조직과 캠페인이 젊은 층의 지지를 폭발적으로 끌어냈다. 흑인 대통령 선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고마운 테크놀로지가 지금은 정치적 분열을 심화하는 도구로 진화했다는 사실을 그는 주목한다. 민주/공화, 진보/보수, 백인/소수인종 등에 따라 끼리끼리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같은 성향의 정보만 취득하며 확증편향을 키워가니 이편과 저편의 골은 깊어만 간다.

여기에 기름을 붙는 것이 가짜뉴스이다. 공인 뉴스미디어처럼 위장한 가짜뉴스들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순식간에 퍼지면서 사실 확인할 틈도 없이 분노와 증오를 키운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뉴스’들이 수시로 찾아들어 특정인이나 집단에 대한 미움을 증폭시키곤 한다.

분열의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우리 모두 당면한 문제이다. 당장 개개인의 관계가 영향을 받는다. 트럼프를 반대하는 민주당 성향 한인들은 트럼프 지지 한인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문재인을 지지하는 ‘문팬’들은 그 반대편에서 ‘문재앙’이라며 비난하는 보수성향 지인들과 마주 앉기도 불편해한다. 양측이 서로를 못 견뎌하니 원수가 따로 없다. 그래도 함께 지내야 하는 사이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정치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없었던 시대는 없다. 지금은 그 정도가 심해서 문제이다. 과거에는 극소수가 극우, 극좌로 분류되었다면 지금은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이 극우나 극좌 성향을 보이고 있다. 테크놀로지가 부추긴 측면이 크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정보 속에서 주의력 지속기간은 짧아졌고, 사색의 기회는 줄어들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생각할까?” 헤아려 보는 수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받아들이는 수용이 점점 먼 일이 되어가고 있다.

양극화한 사회는 마비된 사회이다. 흑백논리로 갈라진 사회에서 소통은 불가능하다. 회색의 완충지대가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이것도 맞고, 저렇게 보면 저것도 맞는, 그래서 다른 생각에 기회를 주는 유연한 의식이 필요하다. 호수의 물은 파랄 수도 있고 붉을 수도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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