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화‘1987’을 보고

2018-01-27 (토) 12:00:00 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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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더 포스트(The Post)’와 ‘1987’, 영화 두 편을 관람했다. The Post는 워싱턴포스트 신문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로스쿨 헌법학 시간에 공부했던 ‘국방부 문건(Pentagon Papers)’ 케이스에 관련된 영화이다.

언론의 자유와 안보 유지에 대한 정부의 권한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케이스였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법률적 논쟁보다는, 신문사의 명운이 걸려 있는 결정을 두고 발행인, 경영진, 편집국장, 기자, 변호사들이 나름대로의 입장과 신념을 서로 나누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국민들에게 올바른 진실을 알려야 하는 언론의 사명이 잘 표현된 영화였다.

사실 ‘1987’을 보기 몇 달 전에는 광주 민중항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택시 운전사’도 관람했다. 그런데 고국의 민주화 과정 중 비극적인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이 두 영화들을 보면서 내가 그 시절에 한국에서 살았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하는 물음들이 찾아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인 1970년 중반에 미국으로 이민 온 나는 데모 한 번 못해 봤다. 어렸을 때부터 신문의 정치면을 종종 읽었지만 정치에 대해 깊게 생각할 만큼 성숙한 나이가 되기 전에 미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단지 중학교 3학년 말에 유신헌법 개헌으로 그 전까지 사회 시간에 배웠던 정부조직에 관한 부분을 급하게 다시 배워야 했는데, 그 때 참 말도 안 되는 개헌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르치던 선생님이 무척 곤혹스러워 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의 앞에 설 기회가 많았고 대중연설을 즐겨 했던 내가, 만일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다면 데모대의 선봉장 노릇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거나 감옥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그랬다면 과연 나는 고문을 버틸 수 있었을까. 아니면 법대에 진학하고자 했던 나는 사법고시를 준비한답시고 학우들이 최루탄과 곤봉 세례를 맞을 때 도서관에 처박혀서 공부를 한다고 했을까. 데모를 한다고 세상이 바뀌겠느냐고 뇌까리면서 말이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소식을 나는 대만에서 들었다. 당시 나는 그 곳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아파트에서 같이 세 들어 살던 대만 사람이 신문을 보여 주면서 너희 대통령이 죽었다고 했다. 독재자였지만 부하의 총에 죽었다니까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음 해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때 서울을 경유했는데 내리지 않았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바로 며칠 전이었고, 서울에서는 ‘서울의 봄’ 막바지 데모가 한창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그 때 데모를 피하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에 내렸다면 나는 과연 데모에 참여했을까 생각해 본다.

대만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가을에 대학교 4학년으로 복학을 했는데, 당시 학교에서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비디오를 보여준다는 안내문이 돌았다. 학교 내의 큰 강의실에서 보여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조작이란 말도 있었고 간첩 또는 조총련이 제작한 것이라고도 했다.


그 때 그 비디오를 보기 위해 온 학생, 교수 그리고 일반인들 모두 한국정보부 요원이 명단을 작성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래서 유학생들 가운데 조심하거나 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당시 비디오를 상영했던 강의실이 가득 찼었고 비디오를 본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사람이 그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잔인한 모습은 영화 ‘1987’에서 또 다시 고문으로 보여졌다. 그리고 고문을 당해 죽었던 대학생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벌어졌던 일들과,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노력을 보면서, 고국의 암울했던 시대가 너무 슬프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만약 1987년에 내가 한국에서 살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로 일하고 있었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라는 물음도 무겁게 찾아 들었다.

어렵던 시절에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희생을 기리며 고국의 계속된 발전을 소원한다.

<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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