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2018-01-20 (토) 이주희 / 가정상담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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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생이 한 자리에 모여 교가나 애국가를 부를 기회가 일 년에 한두 번은 반드시 있었던 학창시절, 나는 함께 노래를 부르는 그 시간이 그렇게 좋았다. 노래를 좋아하고 남들과 같이 하는 일을 좋아하던 나는 신이 나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다.

반 친구들에게는 그런 내가 꽤 이상해 보였나 보다. 개학하고 좀 친해진 후에 ‘그때 널 참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어’ 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달랐다. 어렸던 그때,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 신발로 땅이나 파던 다른 아이들이 ‘틀려’ 보였고, 그 아이들에게는 내가 ‘틀려’ 보였던 거다.

서로의 다름을 그저 다름으로 인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새로운 것이나 낯선 것을 보면 일단 경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처음 보는 나무열매를 아무 의심 없이 따먹거나 낯선 동물을 생각 없이 덥석 만졌다가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지경을 겪으며, 원시 인류는 눈에 익지 않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하고 배척하도록 진화했다.


문제는 낯선 사물에 대한 경계와 배척이 낯선 생각과 문화,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대한 것으로 발전할 때다.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생활방식과 다르게 사는 사람은 ‘틀린’ 사람이다. 나와 다른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은 ‘틀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호박전에 넣을 호박에 미리 소금을 뿌리는 며느리가 불편하고, 상사는 약속 시간 10분 전에 미리 나와있지 않는 부하직원을 게으르다고 여긴다. 다른 것이 틀린 것으로 보이는 거다.

인간관계의 불편함은 대개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온다. 특히 내 의도와 상관없이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을 마치 내가 계획적으로 일으킨 것처럼 생각하고 공격하는 사람을 보면 불편함을 넘어 슬프기까지 하다.

세상 사람들이 내 진심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할 수만 있다면 가슴이라도 열어 마음을 보여주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느끼고 똑 같은 방식으로 산다면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을까.

생각해보면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고 공격하려는 성향은 우리가 그 낯선 대상을 충분히 가까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주의집중을 하지 않고 스쳐본 사물을 하나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빠른 정보 수집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사과는 빨간 공으로 보이고 링컨과 프로이드는 ‘수염 달린 외국 할아버지’로 인식되어 구분이 어렵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예전에 나를 괴롭혔던 사람과 같은 행동거지가 비슷한 사람은 친해지기도 전에 피하게 되고, 그래서 그 사람의 진면목은 영영 알 길이 없다.

어떤 시인이 말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나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자세히 보면 달라도 예쁘다. 달라서 더 예쁘다.

나는 날카로운데 너는 부드럽다. 나는 느긋하고 너는 쫀쫀하다. 나는 높은 곳에 올라 하늘을 보고 너는 낮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을 본다. 나는 식당에서 메뉴판을 5번쯤 정독해야 뭘 시킬지 결정이 되는데, 너는 식당 문을 들어섬과 동시에 주문이 끝난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나는 손부터 덜덜 떨리고 눈물을 쏟느라 말이 안 나오는데, 너는 조곤조곤 따박따박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사과까지 받아낼 줄 안다. 서로 얽혀있고 서로 보완한다. 서로 부딪치고 서로 붙잡는다. 너는 너와 다른 내가 필요하고, 나는 나와 다른 네가 고맙다.

당신과 내가 다른 것이 축복이다. 당신을 통해 나의 나 됨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이주희 / 가정상담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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