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식탁의 평화

2018-01-13 (토) 한수민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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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한국에서는 유독 화재 사고가 많았다. 12월 21일 충북 제천의 스포츠센터에서 발생한 화재로 29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으며, 31일에는 광주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 어린 3남매가 사망하는 비극이 빚어졌다.

안전 불감증의 총제적 난국을 드러낸 제천 화재 사건은 물론이고, 광주 화재 사건도 생활고에 지친 젊은 엄마의 방화냐 실화냐를 놓고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오르내렸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조용히(?) 묻힌 또 하나의 화재 사건이 있었다. 1월 7일 경기도 고양에 있는 아파트에서 불이나 아버지가 숨지고 19세난 대학생 아들이 불을 지른 범인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아들은 경찰조사에서 ”저녁을 먹다가 ‘휴학 중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마와 말다툼을 했으며, 내가 그린 그림을 엄마가 찢어 화가 나서 그 종이에 불을 붙여 침대에 던졌다”고 말했다.

이 기사를 접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어머니는 앞으로 어떻게 세상을 사나?”하는 걱정이었다. 평생 “내 잔소리가, 나의 욱하는 성질이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망쳤다”는 자책감에 시달릴 이 어머니를 생각하니, 모르는 사람이지만 가슴이 먹먹해왔다. 더구나 그 사건이 “저녁을 먹다가” 벌어졌다는 말이 더 아프게 가슴에 와 닿았다.

내게도 딸아이가 한창 예민한 사춘기를 통과할 무렵 매일같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저녁 식탁에 앉아야 했던 기억이 있다. 옛말에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때가 이 때 뿐이니, 모처럼 자녀를 위해 ‘좋은 소리’를 한다는 것이 자녀의 귀에는 밥 먹을 때까지 ‘잔소리’를 퍼붓는 한심한 부모로 비쳐 사달이 나는 일이 흔하다.

사실 가족의 동의어로 쓰이는 식구란 한 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 사이를 뜻한다. 식구들이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살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는 것 이상으로,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안에서 험한 세상을 견뎌나갈 영육 간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의미가 있다.

오래 전, 친정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 하신 말씀이 있다. 어머니께서는 “저녁하기 귀찮다”는 내게 식구들을 위해 저녁을 짓는 것도 세 가지의 축복이 함께 해야 가능하다고 하셨다. 첫째는 저녁을 해먹을 먹거리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건강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함께 먹어줄 식구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하셨다. 나는 당시 “엄마가 예능을 다큐로 받으시네” 하고 웃으며 넘어갔지만, 그 후에도 가끔씩 이 말을 곱씹곤 한다.

식구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밥상을 나누는 일의 의미와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매일 저녁마다 정성을 가득 담아 밥상을 차려내는 주부는 아니지만(사실 굳이 그렇게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 일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식사를 나누는 자리를 소중하게 가꾸어야다는 생각, 적어도 밥상머리에서 할 말 못할 말은 조심해서 가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올 한 해, 이런 저런 새해 소망과 결심들이 많겠지만, 저녁 밥상을 망치지 말자는 결심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직장상사와의 식사가 달갑지 않은 이유가 밥 먹을 때까지 일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때문이라면, 식사 중에 남편에게는 돈 이야기를, 자녀에게 공부 이야기는 삼가는 것이 좋겠다. 굳이 할 이야기가 없다면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떨까. 퇴근길에 하루의 일과를 돌아보고 식탁의 화제로 걸맞은 것을 하나쯤 뽑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는 식구들끼리 밥 먹는 데에 이런 것 까지 신경을 써야 하느냐고 할 지 모르지만, 나는 식구니까, 가장 많은 갈등과 감정의 소모를 빚게 되는 대상이니까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식구들이 모이는 밥상은 영육의 허기를 채우는 자리고, 당연히 그 구성원 모두가 수고를 들여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하는 자리이다.

<한수민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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