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자연이 빚은 ‘진경산수화’

2018-01-12 (금) 제천ㆍ단양=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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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양 구담봉-제천 옥순봉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자연이 빚은 ‘진경산수화’

장회나루를 출항한 충주호 유람선이 구담봉을 지나 옥순봉 앞을 통과하고 있다. 옥순대교 북단 쉼터에 차를 대고, 가은산 등산로로 5분 정도 오르면 펼쳐지는 시원한 풍경이다. <제천=최흥수 기자>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자연이 빚은 ‘진경산수화’

노송과 단풍이 어우러진 기암괴석.


세월이 흐르고 지형이 바뀌어도 자연의 명작은 변하지 않는다. 충북 제천과 단양의 경계에 자리한 옥순봉과 구담봉은 예부터 이름난 문인과 화가가 앞다퉈 절경을 노래하고 그림으로 남긴 명승지다.

남한강 물줄기인 바로 앞 장회탄(長淮灘)은 노를 젓지 않으면 배가 저절로 밀려날 정도로 물살이 센 곳이었지만, 충주댐 건설 이후 잔잔한 호수로 변했다. 바위 절벽의 일부는 물에 잠겼지만 그 풍광은 졸아들기 보다 넓어진 물길과 어울려 한층 더 넉넉해졌다. 행정구역상 옥순봉은 제천이고 구담봉은 단양 땅이지만, 여행객에게는 의미 없는 구분이다. 한번에 보지 못한다면 그게 더 아쉬운 일이다.

우 제비 좌 말 목, 굽이마다 절경


옥순봉과 구담봉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은 유람선을 타는 것이다. 제천 청풍나루와 단양 장회나루를 오가는 관광선(왕복 1시간30분 소요)을 타거나, 장회나루를 출발해 되돌아오는 유람선을 타면된다. 장회나루는 예나 지금이나 옥순봉과 구담봉 유람에 나서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나루터다. 급류에 노를 젓는 사공이 애를 먹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유람선으로 1시간 동안 편안하게 코앞에서 진경산수화를 펼치듯 관람할 수 있다.

지난 3일 장회나루에는 평일임에도 끝자락에 접어드는 가을 정취를 즐기려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다. 유람선은 내부에 좌석을 갖추고 있지만, 승객들은 자연스럽게 앞뒤 갑판으로 이동해 좌우로 펼쳐질 장관에 대비한다.

선착장을 출발한 배는 먼저 상류 단양 방향으로 이동한다. 우측에는 물 찬 제비 형상의 제비봉, 좌측에는 말이 물을 마시기 위해 길게 목을 뺀 모양이라는 말목산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우람한 산세에 가파르게 흘러내린 계곡마다 단풍이 절정이다. 물가부터 곧추선 산자락에 아슬아슬하게 쌓인 기암괴석에는 신선봉 강선대 등의 이름이 붙었다. 신선이 노닐 만한 경치라니 최상급의 표현인데, 유람선이 미끄러질 때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비경을 모두 담아내기엔 오히려 진부한 느낌이다.

단양 방면으로 한 바퀴 돌아온 유람선은 드디어 구담봉과 옥순봉으로 향한다. 구담봉은 거북과 연관된 이름이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거북의 형상이라거나, 물속에 거북 무늬의 바위가 있다는 얘기도 전한다. 어떻든 유람선이 지나는 남한강은 큰 거북이 헤엄치는 연못, 구담(龜潭)인 셈이다. 바로 아래 옥순봉은 힘차게 솟아오른 바위 봉우리의 모습을 비가 온 뒤 쑥쑥 자라는 죽순에 빚댄 이름이다. 올곧음을 중시하는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다. 멀리서 신비한 모습도 가까이서 보면 감동이 반감되기 마련인데, 유람선이 두 봉우리 바로 아래를 지날 때면 겹겹이 붙고 층층이 쌓인 바위의 모습이 더욱 기묘하다. 자연이 그린 대형 산수화로 빨려 들어가듯 생생하면서도 몽환적이다. 큰 유람선에서도 이토록 압도적인데, 아랫부분이 물에 잠기기 전 나룻배로 풍류를 즐겼을 옛 사람들에게 구담봉과 옥순봉의 웅장함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구수한 입담에 더욱 풍성해지는 유람선 여행

유람선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역사적 사실에 입담을 가미해 재미를 더하는 안내방송이다. 수많은 기암 중에서도 더 특이해 보이는 바위는 어김없이 걸맞은 이름에 이야깃거리 하나쯤 덧붙었다. 구담봉을 지날 땐 암수 거북 봉우리를 설명하며 아슬아슬하게 19금을 넘나들고, 옥순봉을 지날 땐 퇴계 이황과 ‘두향’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조선 명종 때 관기였던 두향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이황에게 옥순봉을 단양 땅으로 해 달라는 청을 넣었단다. 하지만 청풍군수(현재는 제천시에 편입)의 거절로 일이 성사되지 않자 이황은 옥순봉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 즉 단양의 관문이라는 글귀를 새겼다. 그 글귀는 현재 물밑으로 가라앉아 볼 수 없지만, 두향의 가묘는 근래에 강선대 부근으로 이장해 유람선에서도 볼 수 있게 했다. 옥순봉을 둘러싼 제천과 단양의 신경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제천 관광안내서는 이웃한 두 봉우리 중 옥순봉만 소개하는데 반해, 단양은 구담봉과 옥순봉을 함께 단양팔경으로 소개한다.


남한강 물길을 이루는 맞은편 산세도 두 봉우리에 못지않다. 특히 거대한 새 둥지를 닮은 둥지봉의 바위들은 웅장하면서도 부드럽고 아기자기하다. 층층이 쌓인 모양새 하나하나가 작품이고, 바위틈에 뿌리내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산수화다. 가은산과 금수산 줄기를 타고 내린 아름다움이 이곳에서 한데 모인 듯하다. 바다가 없는 충청북도는 충주호를 ‘내륙의 바다’로 소개한다. 드넓고 푸른 물줄기 따라 막히고 트이는 풍경이, 바닷물이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든 피오르에 비할 만하다. 이황은 이곳의 경치를 중국 양쯔강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 비유했다. 그러나 겸재 정선의 구담봉도와 단원 김홍도의 옥순봉도는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많은 이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대표적인 진경산수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좌우로 펼쳐지는 선경에 넋을 놓고 있노라면 유람선은 어느새 빨간 철제 골격이 돋보이는 옥순대교 아래를 돌아온다. 옥순대교에서 장회나루로 돌아올 때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어 조금 더 빨리 이동한다. 가을비가 흩뿌리는 장회나루에선 또 다른 여행객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일렬로 부교를 건너 유람선에 오르고 있었다. 석벽에 노송과 단풍이 어우러진 늦가을 구담ㆍ옥순봉 풍경은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운치를 발한다. 장회나루를 출발해 옥순대교에서 되돌아오는 유람선 요금은 1만3,000원, 청풍나루까지 편도는 1만원(왕복 1만5,000원)이다.

유람선이 번거롭다면 옥순대교 북단 쉼터에 차를 세우고 가은산 등산로를 올라 보길 권한다. 5분 정도만 오르면 충주호의 푸른 물결과 옥순봉ㆍ구담봉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조금만 걸어도 풍경이 넉넉하고 시원하니 전망대 치고는 요즘 말로 ‘가성비 갑’이다. 옥순봉과 구담봉에 직접 오르는 등산로도 있다. 장회나루에서 제천 수산면으로 이어지는 도로 계란재에서 시작한다. 출발지점은 같지만 중간에서 길이 좌우로 갈라진다. 어느 봉우리를 목적지로 삼든 왕복 2시간은 잡아야 한다.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등산로는 잘 정비돼 있다.

<제천ㆍ단양=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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