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 모두 “파잇 온!”

2017-12-30 (토) 김덕환 / 실리콘밸리 부동산 중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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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톡! 대부분의 입주사가 긴 연말휴가에 들어간 사무실엔 쓸쓸함이 감돈다. 살짝 졸다 정적을 깨는 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려본다. 셀폰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니 LA에 사는 작은 아들이다. 할리웃에 위치한 상용부동산 투자회사에서 회계사이자 내부감사로 일하는 아들이 보내온 것은 단 한자의 회신, “응”이다.

효도와 우정 그리고 사랑은 절대 구걸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지만, 한해가 바뀌는 아쉬움과 그리움의 계절에도 집에 오지 못하고 열심히 살고 있는 아들에게 아빠를 사랑 하는지 확인은 해보고 싶었다. 꼬박 12시간 만에 보내온 답장이다.

이렇게 여유(?) 있는 아들에게도 배울게 많다. 이메일이든 메시지든 댓글이든, 보내온 사람의 성의가 고마워 즉시 즉시 대답을 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나는 가끔 너무 가볍지 않은가 반성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온도를 잴 수 있는 온도계를 하나씩 갖고 있다. 보내온 글이 얼마나 속 깊고 다정한지, 얼마나 성의 있는 시간 내에 답장을 보내오는지, 글자 한자 한자 속에 상대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잊지는 않는지.. 등등으로 우리는 빛보다 빠른 생각의 속도로 상호관계의 온도를 아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아들은 아마도 연말 ‘불금’에 친구들과 송년회식을 하며 어울리느라 새벽에 귀가해 한껏 늦잠을 잔 후에 답장을 보냈을 것이다. 그 나이 적 내 모습을 기억하면서 씨익 웃는다. 귀엽고 소중한 아들… 주고받은 내용은 비록 짧은 한 줄씩에 불과하지만, 서로의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누기에 충분히 긴 분량이다. 이 세상에서 부모 자식으로 만난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인지.

올해의 마지막 수중 생존 클래스를 마친 후 멤버들은 로비에서 따끈한 커피를 나누며 각자 회사에서 있었던 송년파티에 관해서 또는 레이크 타호로 스키여행이라도 가는지 등에 관해 이야기꽃을 피운다.

8명의 수영 클래스 멤버들 가족 중 3명이 애플에 근무 중이다. 최근 구글에 1위 자리를 넘겨주긴 했지만 애플은 시가총액 9,000억 달러(900조원)로 실리콘밸리 최고의 아이콘 기업. 멤버 중 변호사인 두 여성의 컴퓨터 공학박사 남편들은 시니어 엔지니어로, 그리고 30대 후반의 중국계 에이드리안은 글로벌 부품 소싱 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애플인지라 부문별로 열리는 송년파티도 태평양 해안 절벽 위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최고급 호텔 리츠 칼튼의 연회장에서 가족들까지 초대해 산해진미를 마음껏 즐기는 축제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1만 달러의 현금 경품까지도 걸렸다니 현장의 흥분된 분위기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수영 팀의 리더로 넷플릭스 등 인터넷 구독 사업을 하는 벤처기업의 고위직 리처드의 순서가 되자, 말하는 그의 표정이 무척 어두워 보고 있는 내 마음도 따라 무거워진다. 회사의 실적이 시원찮아 연말 보너스는 물론 송년파티도 없어 회사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기가 잔뜩 떨어진 부하직원들에 대한 미안함에 죄책감을 느끼는 한편 그들을 다독여주기까지 해야 하는 입장이라 참 곤혹스럽다는 것이다.

고액연봉을 받고 있는 자신의 앞날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한발 한발 다가오는 것 같아 가끔 새벽녘에 잠을 깬다고 한다. 처가가 있는 대만으로의 연말여행은 언감생심, 300만 달러는 쉽게 나가는 멋진 집을 팔로알토에 갖고 있지만 모기지와 재산세를 납부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서 보너스를 줘야하는 부하직원도, 부진한 실적으로 눈치를 봐야하는 하는 상사도 없는 내가 참 부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리처드, 명색이 회사대표지 아무런 보장 없고 부정기적 수입에 의존하면서 모든 걸 홀로 책임져야 하는 1인 기업의 애환을 자네가 몰라서 그래” 라는 말이 입안에서 뱅뱅 돌았다.

내일이면 핵실험과 미사일로 점철된 2017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아쉬웠던 일, 행복했던 일 모두 다 잊고 무술년 2018년 개띠 새해를 가슴을 활짝 열고 당당하게 맞이하는 거다. 아들의 모교, USC의 경기 구호를 떠올려본다. 나의 15년 지기 수영친구 리처드, 그 어떤 어려움이 밀려와도 절대 포기하지 마. 끝까지 싸우는 거야! 파잇 온(Fight on)!

<김덕환 / 실리콘밸리 부동산 중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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