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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스칼라의 ‘나부코’

2017-12-29 (금) 정숙희 부국장·특집 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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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일주일, 밀라노에서 이틀 일정으로 지난 달 친구들과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을 때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라 스칼라’였다.

콜로세움, 바티칸, 폼페이, 카타콤베, 카라칼라 욕장, 그리고 수많은 성당과 뮤지엄 방문으로 일정이 빼곡했지만 하일라이트는 ‘밀라노의 심장이자 영혼’ 라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이었다.

티켓 구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이곳에서 2017 시즌의 마지막 날(11월19일) 베르디의 ‘나부코’를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요 감격이었다. 더구나 바로 한달 전에 LA 오페라가 공연한 플라시도 도밍고 주연의 ‘나부코’를 보았던 터라 기대감은 극에 달했다.


라 스칼라가 어떤 곳인가.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과 위대한 가수들이 무대에 올랐던 곳, 250년 역사 동안 350편의 오페라가 초연된 극장, 지금도 세상 모든 성악가들이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가 아닌가. 당연히 오페라 팬들은 일생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오페라의 메카인 곳이다.

‘나부코’ 역시 바로 이곳에서 1842년 초연됐으니 그로부터 175년 후 같은 장소에 앉아(사실 극장은 화재와 전쟁으로 파괴돼 수차례 복구와 개보수를 거쳤다) 관람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고, 극장 로비에 들어서자 베르디,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 등 이탈리아 오페라를 빛낸 작곡가들의 동상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있었다. 오기 전 읽어본 블로그 리뷰 중에 별로라는 등 옛날의 라 스칼라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휘자는 거동조차 힘겨워 보이는 86세 고령의 넬로 산티, 출연 가수들의 이름도 모두 낯설어서(하긴 유럽에 오페라 가수가 얼마나 많으랴) 살짝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막이 오르고 합창이 시작되자마자 모든 기우는 깨끗이 사라졌다. “역시 라 스칼라!” 하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압도적으로 좋았다. 기본이 탄탄하다는 느낌, 출연자 모두 고르게 출중한 노래와 연기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보기 좋았다. 특히 여주인공 아비가일레 역의 소프라노(Anna Pirozzi)는 엄청난 성량에 화려한 벨칸토 창법을 구사하며 카리스마와 감정, 연기까지 대단한 열연이었다.

무엇보다 연출이 세련되고 프로페셔널 했다. 기원전 6세기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수 이야기를 현대로 옮겨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역사에 살짝 빗댄 점이 신선했고 의상과 배경, 흑백 처리한 영상이 모두 인상적이었다. 연출이 무척이나 쿨해서 나중에 찾아보니 전설적인 지휘자 고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아들인 다니엘 아바도가 감독한 것이었다.

공연장 음향도 아주 우수했다. 합창이 많고 관현악이 장중한 ‘나부코’를 휘황찬란하게 입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2004년 개보수 후 재개관한 극장의 첨단 어쿠스틱 덕분이었을 것이다.(50년이 넘은 LA 뮤직센터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 제발 좀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한가지 아쉬웠던 건 오케스트라의 연주 템포였는데, 현대적 배경의 프로덕션에 맞춰 조금 빠르고 역동적으로 연주했더라면 훨씬 생생한 오페라가 되었으리라.


라 스칼라는 관객 또한 쿨 했다. 발코니 석에서 늘 터져 나온다는 박수부대의 ‘브라보’와 야유부대의 ‘우우~’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그러기는커녕 관객들은 박수를 무척 아꼈고, 아주 특별한 아리아가 아니면 환호하지 않았다. 따라서 공연의 흐름이 자주 끊어지지 않는 점은 좋았으나 툭하면 박수에 브라보를 외치는 LA 공연문화에 익숙해있다 보니 좀 ‘깍쟁이 같다’는 느낌이 살짝 들기도.

심지어 두번 부르기로 유명한 ‘노예들의 합창’도 단 한번으로 끝내버리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통일의 노래, 혹은 제2의 국가로 불리는 이 합창곡은 오페라 공연 도중 관객과 함께 한번 더 부르는 전통이 있고, 그게 처음 시작된 곳이 바로 라 스칼라다. 그런데 그런 전통쯤은 자기네가 세우고 또 자기네가 없애버릴 수 있다는 듯 칼같이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아쉬워라.

2017년도 다 갔다. 올 한해 좋은 공연을 많이 보았지만 최고의 순간은 라 스칼라에서의 ‘나부코’였다. 언제 다시 가볼 수 있는 날이 오려나, 새로운 희망을 꿈꿔본다.

<정숙희 부국장·특집 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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