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수제비

2017-12-15 (금) 12:00:00 양안나(버클리문학회원)
크게 작게
지난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연일 100도가 웃도는 더위를 피해 주말이면 한적한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서곤 했다. 절친한 캠핑 고수들과 희뿌연 새벽에 집을 나와 야영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마자 점심으로 솜씨 좋은 멤버가 집에서 숙성시켜온 수제비 반죽을 버너 위의 멸치 육수 속으로 모두가 둘러서서 얇게 뜯어 넣었다. 이 구수한 음식을 숲속 야영지에서 땀을 흘리며 여럿이 먹는 맛은 상상도 못한 별미였다.

서울에서 친구가 석촌호수 근방의 수제비 전문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칼국수 전문점은 자주 갔지만, 수제비를 전문으로 파는 곳이 있다니 신기해서 가보기로 했다. 넥타이를 맨 젊은 회사원과 여고 동창 모임이거나 계 모임을 하는 듯한 멋쟁이들 옆에 앉아서 우리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식당 안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말과 수저 소리로 가득 찼다. 열무김치와 투박한 항아리에 담아 나온 강원도 명물 감자옹심이가 갓 썰어 넣은 애호박과 함께 여름 냄새를 풍기며 나왔다. 송송 썬 파와 풋고추를 넣은 양념장을 곁들인 쫄깃쫄깃한 수제비는 소문대로 일품이었다.

장국 수제비나 바지락 국물에 호박과 감자를 채를 썰어 넣은 예전의 수제비가 먹고 싶어 만들어 보면 그 맛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만들지 않는다. 수제비는 혼자서 먹는 것보다 여럿이 먹어야 제 맛이 난다. 여름날 마당과 나무에 물을 뿌린 후 시원한 마루에 앉아 매미소리 들으며 식구들이 다같이 머리를 맞대고 먹은 기억이 새롭다. 칼칼하면서도 시원한 김치와 함께 먹었던 어머니의 수제비가 그리워진다.


수제비의 쫄깃쫄깃한 맛은 손맛이 좌우하는 음식이다. 여름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어머니는 수제비와 부추 호박전을 자주 만들었다. 어머니는 투박한 손으로 찬물에 손을 적시며 끓는 육수 속으로 균일하게 밀가루 반죽을 뜯어 넣으셨다. 나는 곁에서 전을 뒤집으면서 수십 번도 더 들은 당신의 일생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장단을 맞추었다.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전의 기름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이야기는 익어 갔다.

어머니는 종종 수제비 속에 따로 큼직하게 썰어 넣은 감자를 당신 그릇에 담곤 하셨다. 어려운 시절 시어머니보다 매서운 큰동서의 시집살이를 살은 아랫동서는 수제비를 끓이면 감자를 좋아하시는 큰어머니의 그릇으로 감자를 건져 드렸다고 했다. 수제비에 어머니의 서러움과 정이 들어 있었다.

<양안나(버클리문학회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