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토지’의 무대 경남 하동, 시린 겨울… 드넓은 평사리 들판엔 문학의 온기가
2017-12-15 (금)
글·사진(하동)=우현석 객원 기자
▶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같은 땅… 소설 속 애증·갈등 전해지는듯
▶ 드라마세트장 최참판댁 길목엔 주인공 이름딴 상점들 줄줄이
다년간 여행지 취재를 위해 이 산하를 헤매고 다녔지만 여행은 경치 구경만큼이나 사람과 만나 얘기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때로는 혼자만의 여행을 즐겨볼 일이다. 홀로 떠나야 객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산 너머에 걸친 노을의 ‘디테일’이 비로소 또렷이 보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
혼자 하는 여행의 재미에 빠져든 요즘이다. 그래서 이번 주도 혼자 떠나려고 했는데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역명사 문화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고 연락이 왔다.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라기에 모처럼 초청에 응해 경남 하동 등지를 둘러봤다.
이틀간의 프로그램 중 첫날 찾은 곳은 하동군 평사리문학관. 드라마세트장으로 지어진 최참판댁도 함께 있는 곳이다. 140㏊, 여의도 3배 면적의 평사리 벌판의 지주 최참판댁과 소작들, 그 주변 사람들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애증과 갈등이 이야기의 뼈대를 이룬 작품이 ‘토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처럼 보이는 평사리의 이 들판은 고(故) 박경리 선생이 지난 1969년부터 장장 25년간 집필했던 소설 ‘토지’의 무대다. 차에서 내려 최참판댁으로 이동하는 길목에는 소설 ‘토지’ 주인공들의 이름을 딴 식당과 상점들이 즐비했다. ‘토지’라는 작품이 마을주민들에게 상호(商號)의 소재를 제공해 밥벌이에 일조하는 모습은 최참판댁 농지가 소작들의 호구(糊口) 방편이었다는 설정에 겹쳐졌다.
최참판댁 앞에 당도하자 뜰 앞에 나와 있던 최영욱 평사리문학관장(시인)이 여행취재단을 맞았다. 하동 토박이로 박경리와 ‘토지’에 심취해 오늘날 평사리문학관을 일군 주인공이다. 최 시인은 “내가 어쩌다가 평사리문학관장이 됐는지 잘 모르겠다. 다음에는 ‘토지’보다 내 시를 가지고 얘기하러 찾아와주기 바란다”면서 너스레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어 “토지의 모티브는 단순하다. 섬진강에서 홍수가 나면 개치나루로 거지가 들어와 동냥을 하다 나갔다”며 “한번은 이곳에 들어왔던 거지 모자가 굶어 죽으면서 ‘이 집 창고에는 곡식이 넘쳐날 테지만 정작 그 양곡을 먹을 자손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는 구전이 모티브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참판댁 소작들이 겨울밤에 모여 새끼를 꼬던 행랑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더니 평사리문학관을 개관하게 된 사연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2002년 드라마세트장으로 지어진 후 지자체가 모색하던 최참판댁 활용방안과 내가 구상하던 토지문학관의 방향이 맞아떨어졌어요. 문학관 전환에 대한 허락을 받기 위해 원주의 박경리 선생을 일곱 번 찾아갔죠. 하지만 반대가 완강했어요. 박경리 선생의 승낙을 얻어낸 것은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의 도움이 컸습니다. 얼마 안 되는 나이 차이에도 박완서 선생은 박경리 선생을 어머니 대하듯 깍듯했어요. 그런 그가 ‘이제 그만 승낙해주라’고 하니 박 선생이 겨우 허락하게 된 겁니다.”
최 관장은 박경리 선생의 사위 김지하에 대한 애증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단편 ‘계산(計算)’으로 등단한 박경리 선생은 1969년부터 ‘토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토지를 쓰던 와중에 김지하를 만났죠. 고 지학순 주교가 ‘사람 하나 보낼 테니 일주일만 숨겨달라’고 했는데 그게 김지하였고, 그는 숨어 있는 동안 선생의 딸 김영주와 로맨스가 싹터 결혼까지 했죠. 하지만 민주화운동으로 옥을 드나들던 사위를 선생은 ‘원수’라고 불렀어요. 딸 김영주는 옥바라지로 세월을 보냈고 박 선생은 손자 김원보를 맡아 키우다시피 했답니다.”
최참판댁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최 관장의 설명의 듣는 동안 해는 악양 들판 서쪽으로 뉘엿뉘엿 떨어졌다. 그 시간은 40년 전 어느 추운 겨울날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이 언도됐던 그 ‘원수’가 옥문을 나오던 그 시간쯤이었다.
그날 기자 신분으로 김지하의 석방을 취재하러 갔던 소설가 김훈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김지하의 석방을 취재하러 갔던 날은 몹시 추웠다. 기자들이 형무소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형무소 맞은편 언덕배기에 중년 여자가 포대기로 아기(김지하의 아들 김원보)를 둘러업고 서 있었다. 그는 그 추운 날씨에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옥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김지하가 나오자 지지자들은 그를 무동 태우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아기를 둘러업은 여성은 그저 그 자리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박경리였다.”
그 후 40년의 세월이 살처럼 흘렀다. 박경리는 2008년 세상을 떠났다. 김지하는 세상을 뜬 장모의 소원이라도 들어주고 싶었는지 ‘새 사람’이 됐다. 시간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어스름이 내리는 악양의 벌판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어두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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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하동)=우현석 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