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악마의 바람

2017-12-0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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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들은 가주를 위협하는 자연 재해 하면 지진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다행히 인명 피해가 발생할 정도의 지진은 드물게 일어난다. 1906년 4,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샌프란시스코 지진은 대재앙이었지만 일어난 지 100년도 넘는다.

전문가들은 이런 급의 지진이 향후 30년 동안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언제 일어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 일어난다 해도 지진에 대비해 건축 규제가 강화돼 1906년 대지진만큼 인명 피해는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한 해도 빼놓지 않고 가주를 찾는 자연 재해가 있다. 산불이다. 게다가 산불은 빈도도 잦고 규모도 커지고 있다. 가주에 발생한 10대 산불 중 4개가 지난 14년 사이 일어났다.


지난 10월 북가주 소노마와 나파를 강타한 산불은 화마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가주 사상 최대로 꼽히는 이 산불로 44명이 사망하고 7,000여채가 불탔다.

이 산불의 특징은 산 동네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평지의 주택가가 융단 폭격을 맞은 것처럼 전소했다는 점이다. 산불 최대 피해 지역인 샌타 로자는 불이 난지 두 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불에 타 이그러진 차만 널려 있는 폐허로 남아 있다.

산불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도심 주택가가 이렇게 된 것은 때맞춰 불어온 디아블로(스페인 말로 ‘악마’라는 뜻) 바람 때문이다. 대평원과 사막 지역에서 발달한 고기압이 디아블로 계곡을 타고 해안 쪽으로 흐르며 발생하는 이 바람은 덥고 건조하며 빠른 것이 특징인데 이 바람을 타고 불똥이 6차선 프리웨이를 넘어 주택가로 튀는 바람에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 ‘악마’라는 이름 값을 톡톡히 한 셈이다.

북가주에 디아블로 바람이 있다면 남가주에는 샌타애나 바람이 있다. 샌타애나 계곡을 따라 흐른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지만 성질은 비슷하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한 여름이 지나고 10월부터 불기 시작하는 이 바람은 악마가 산불을 활활 잘 타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될만큼 산불 위험이 가장 클 때 위력을 발휘한다. 가주 10대 산불 중 4개가 10월에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달 전 북가주에서 일어났던 일이 이번에는 남가주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다. 강한 샌타애나 바람을 타고 벤추라를 강타한 산불이 오하이, 샌타클라리타를 거쳐 남가주 대표적 고급 주택가인 벨에어까지 덮쳤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교통 체증이 심한 이 일대 405 프리웨이가 6일 한 때 양 방향 모두 통제돼 극심한 교통 대란이 발생했다.

벨에어 일대는 1961년 대형 산불로 500채 이상이 탔던 곳으로 화재 안전 법규가 남가주에서 가장 까다롭다. 그 때문에 그 후 산불이 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바람에 불길 잡기가 더욱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가주 전체를 봐도 사정은 좋지 않다. 올해 가주는 작년에 내린 폭우로 풀들은 엄청 자랐는데 여름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더웠다. 거기다 샌타애나 바람은 평년보다 2배나 많이 불고 있다. 대형 산불이 발생할 조건을 이처럼 골고루 갖출 수는 없다.

기상청은 7일 바람이 더 거세질 것으로 보고 있다. 당분간 비 소식은 없고 언제 불 길이 잡힐 지 기약조차 할 수 없다. 올해는 가주 사상 최악의 산불 시즌으로 기록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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