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선냄비

2017-12-0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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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도시마다 노숙자 문제가 심각하지만, 126년 전인 1891년 겨울 샌프란시스코에는 유난히 노숙자들이 많았다. 인근 바다에서 배 한척이 파손되면서 난민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없고 거처도 없는 이들이 한겨울의 한기를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지역 구세군의 조셉 맥피 사관은 그들의 처지가 몹시도 안타까웠다. 그들이 길바닥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내몰린 채 크리스마스를 맞을 생각을 하면 특히 가슴이 아팠다. 크리스마스 날만이라도 그들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하고 싶었다.

그들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 고심하던 그에게 떠오른 것이 자선의 솥이었다. 그가 영국, 리버풀에서 선원으로 일하던 당시, 부둣가에는 자선의 솥이 있었다. 길 가는 사람들이 솥에 돈을 던져 넣으면 그렇게 모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다음날로 그는 오클랜드 부둣가에 솥을 내걸었다. “이 솥을 끓게 합시다”라는 문구에 많은 사람들이 지갑을 열면서, 그해 크리스마스에 1,000여명이 따뜻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연말이면 등장하는 정겨운 전통, 구세군 자선냄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올해도 LA 한인타운 곳곳에 자선냄비가 설치되었다. 지난달 17일부터 오는 23일까지 5주간 계속될 한인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행사의 목표액은 8만 달러. 지난해에는 목표액 5만 달러에 좀 못 미치는 4만8,000달러가 모금되었다. 올해는 모금 시간을 하루 2시간씩 늘리고 목표액도 상향조정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다.

봉사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선냄비 주변에서는 몇 가지 재미있는 현상들이 눈에 띈다.

첫째는 없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 사정을 더 잘 헤아린다는 것이다. 냄비에 돈을 넣는 손길들을 관찰해보면 비싼 차 타고 오는 사람들보다 허름한 차 타고 오는 사람들, 웰페어 타서 생활할 것 같은 노인들이 더 많다고 한다. 한 봉사자는 전한다.

“커피며 드링크, 빵이나 과일을 전해주며 격려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주로 돈 많아 보이지 않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지요.”

둘째는 엄마 따라 봉사에 나선 2세들의 모습이다. 구세군이 커뮤니티 서비스 인증서를 발급하면서 중고교 학생들이 봉사 학점도 챙길 겸 많이 참가한다. 처음에는 대부분 마지못해 끌려나온 모습들이다. 친구가 보면 어쩌나 경계를 하면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자선냄비 옆에 서 있기 일쑤이다.

그런데 봉사를 거듭하다 보면 아이들의 태도가 바뀐다. “안녕하세요?”하며 기부를 부탁하는 목소리부터 달라진다. 봉사하는 기쁨과 보람을 배우는 산 교육의 장이 된다.

셋째는 기부자와 수혜자의 분리이다. 한인 구세군 자선냄비는 거의 100% 한인들의 기부로 채워지지만 그 기금으로 진행되는 크리스마스 장난감 나눠주기, 급식 서비스 등의 수혜자는 흑인 히스패닉 등 타인종들이다. 한인들의 전반적 삶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한인사회라고 형편 어려운 사람들이 없을 리 없다. 크리스마스에 아이들 장난감 사주기 어렵거나 따뜻한 한끼 식사가 필요한 한인들이 구세군 자선행사에 와서 혜택을 받기를 구세군 측은 바라고 있다.

앞으로 남은 10여일, 자선냄비에 기부의 손길들이 많이 찾아들기를 바란다. 넉넉하게 나누는 마음들이 모이면 추운 겨울이 훈훈해지는 기적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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