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밑의 단상

2017-12-0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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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구세군의 빨간 자선냄비가 등장했다. 세밑이 된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젖게 되는 상념은 덧없이 흐르는 것이 세월이라는 삶의 무상함이다.

그 덧없는 세월을 성당(盛唐)의 시인 이백은 이렇게 묘사했다. “천지라는 것은 만물이 잠시 쉬었다 가는 여관이고 세월이란 것은 백대의 길손이다”

“해마다 꽃은 비슷하게 피어나는데 해마다 사람은 같지가 않네” - 역시 흐르는 세월의 안타까움을 읊은 시로 이 시의 작가는 이 빼어난 두 구절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고문진보’에는 이 시구가 송지문의 작품으로 돼 있다. ‘당재자전’에는 그러나 원래의 작자는 그의 사위 벌 되는 유희이로 이 구절을 빼앗기 위해 송지문이 그를 죽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래서인가. 한 해가 그 끝자락을 들어내는 세모의 계절이 되면 새삼 곰씹게 되는 것이 이 구절이다.

모임을 알리는 기사가 부쩍 많아졌다. 또 한 해가 간다. 그 지나간 날들을 아쉬워하며 함께 자리를 하자는 모임이다. 한동안은 망년 모임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송년 모임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1400여 년 전부터 12월이 되면 가까운 사람들과 한자리에 모여 지난 한해의 괴로웠던 일, 슬펐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자는 뜻으로 회식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망년회라는 말은 그러니 원래 일본에서 건너 온 용어다. 이런 자각과 함께 송년 모임으로 이름이 바뀐 모양이다.

이 시즌이 그런데 그렇다. 한국인이 마시는 술, 그 술의 절반이 12월에 소비되는 것으로 통계는 전하고 있다. 술로 흥청대는 송년 모임이 세밑에 집중되는 탓이다.

‘한잔 술은 능히 만고의 시름을 씻는다’ - 어렵게 한 해를 보냈다. 그 세밑에 그리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한 잔의 술은 삶의 윤활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몸 안으로 술을 들이붓는다고 할 정도로 마셔댄다. ‘송년회=술자리’란 등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송년 모임이 아니다. 망년 모임이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셔서 괴로웠던 일을 잊자는 것이 본래 의미의 ‘망년(忘年)’ 모임이었으니까.

세월이 각박하다. 촛불, 탄핵, 태극기 시위 등으로 점철됐다. 거기다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 소리는 전쟁의 소문이었다. 정유년 2017년은 한국인들에게는 정말이지 힘든 한해였다. 그러니 술로 잊고 지내고 싶다는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마냥 안타깝고 허무한 일이기만 한 것일까.

미련도 있고 아쉬움도 있다. 그렇지만 겸손히 나를 비우고 저물어 준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한 시인은 묘사했다. 태양도 새날을 위해 오늘 조용히 저물어 주고 있듯이.

조용한 한 해의 마무리와 함께 아픔, 응어리짐, 그 모든 것을 비워내는 세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보다 찬란한 내일의 일출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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