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 뒷마당’의 딜레마

2017-12-02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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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는 동부의 대도시들과 태생적 차이가 있다. 뉴욕, 필라델피아 등 동부 도시들은 철도 시대에 건설되었다. 도심의 상업지구와 교외 주거지역이 통근열차와 전차로 연결되었다. 대중교통은 필수였다.
반면 LA는 자동차 시대에 건설되었다. 자동차가 대중화하면서 미 전역에서 차를 타고 몰려든 사람들로 만들어진 자동차 문화의 도시이다. 1940년 기준 LA의 자동차 수는 100만대. 다른 41개 주의 자동차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
남가주가 자동차의, 자동차에 의한 도시로 출발한 데는 자동차업계의 음모도 숨어 있었다. 1930년 즈음부터 제너럴 모터스는 대리기업들을 앞세워 각 도시 전차 시스템을 속속 사들여 없애버렸다.
결과적으로 남가주는 자동차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 되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굳어진 것은 빈자와 부자의 분리이다. 자동차 없는 극빈층이 부유층 지역에 얼씬거릴 일은 원천 봉쇄되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가진 자들만의 세계로 평온했던 한 도시가 최근 틈입자들로 인해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남가주의 대표적 부촌 말리부가 노숙자 문제로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말리부 연합감리교회가 한 기독교단체와 손잡고 3년 전부터 노숙자들에게 주 2회 저녁식사를 제공한 것이 발단이었다. 교회로서는 굶주린 이웃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의 실천이었는데 시정부의 입장은 달랐다.
노숙자들이 늘어나면서 잡음들이 생기고, 주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시정부는 무료급식 중단을 촉구했다. 전망 좋은 말리부 언덕에서 최고급 공짜 식사를 제공하니 노숙자들이 점점 더 몰려든다는 것이다.
말리부에 노숙자가 늘어난 것은 지난해 버스 노선이 생긴 것과 상관이 있다. 노숙자들에게 발이 생긴 것이다. 뿌리 깊은 자동차 사랑 덕분에 교통체증이 전국 최악에 이르자 남가주는 뒤늦게 대중교통 시스템 확충에 나섰다.
인구 1만3,000명 중 90%가 백인인 말리부에서 노숙자들은 우선 시각적으로 너무 구분이 되었다. 주로 흑인인 노숙자들이 주민들의 눈에 친근할 리는 없다. 무료급식 장소인 말리부 교회 바로 옆에 어린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도 주민들에게는 불안했다.
노숙자들을 ‘형제’로 보듬어야 한다는 교회 측과 주민들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시정부 측의 마찰, 무료급식을 둘러싼 지역주민들 간의 찬반 갈등은 지난 몇 주 전국적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교회 측이 결국 지난 추수감사절을 끝으로 급식 프로그램을 잠정 중단하자 말리부에는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시의원들에게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이 날아들 정도이다.
비난내용은 한마디로 ‘우리 뒷마당에서는 안 돼(NIMBY)!’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또 그렇기도 하다. 말리부 주민들은 돈 많고 진보성향 강한 만큼 기부도 많이 한다. 노숙자 문제가 불거지자 전담 소셜워커들을 고용해 지난 1년 동안에만 노숙자 24명이 거리 생활을 청산하고 재기하도록 도왔다. 그렇게 기금을 모아 돕기는 하겠지만, 주민들의 일상 너무 가까이에 노숙자들이 끼어드는 것은 허용하지 못하겠다는 입장이다.
‘뒷마당’ 딜레마는 부촌 백인들만의 문제일까. 대부분 넘어서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라티노 주민들이 모여 사는 LA 인근 보일 하이츠에서도 비슷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LA 시는 지난해 노숙자 주거지원을 위한 공채발행 주민발의안을 통과시켰다. 12억 달러의 기금을 조성해 노숙자 주거시설을 만들자는 취지에 주민들은 부동산 세금이 올라가는 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노숙자 권익옹호 단체들이 환호했던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당장 브레이크가 걸렸다. 기금이 마련되고, 부지가 확보 되었지만 보일 하이츠에 정신질환 노숙자를 위한 49 유닛 주거시설 건축안은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지역 인기 샤핑몰에서 너무 가깝다는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말리부 노숙자 급식에 앞장섰던 한 여성은 말한다. “엄연히 뒷마당에 있는 사람들을 언제까지 거기 없는 척 할 것인가.” 보일 하이츠의 노숙자 시설 반대 시민은 말한다. “건축프로젝트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반대한다. 지지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다.”
노숙자가 너무 급격히 늘면서 개인적 사회적 고민이 깊다. LA 카운티의 경우 노숙자는 지난 1년 동안 23%가 증가해 곧 6만 명을 넘을 전망이다. 노숙자가 왜 늘어나는 지는 멀리 돌아볼 필요도 없다. “만약 직장을 잃는다면” 가정 하에 각자 은행 잔고와 치솟는 렌트비를 비교해보면 바로 계산이 나온다. 몇 달 버티지 못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추운 겨울,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 우리 앞에 놓인 큰 숙제이다. 고민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들의 추위가 덜어지지 않을까.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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