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 단상

2017-12-02 (토) 김완수/작가
작게 크게
샌프란시스코하면 떠오르는 것은 국사 시간에 배운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일본 앞잡이 스티븐스를 암살한 곳. 어릴 적 신기한 눈으로 보았던 달력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 사진. 추억의 팝송 스콧 맥켄지가 부른 ‘샌프란시스코’ 등등 뭔가 낭만적일 것 같은 항구 도시다.

정오 경 도착, 점심을 간단히 먹고 금문교부터 찾아갔다. 샌프란시스코의 상징물인 이 다리가 완공된 시기는 1937년, 당시 나의 조국은 일제 강점기였다. 일제의 수탈이 가장 극에 달하던 시기며 대다수 백성은 문맹에 자동차, 전기도 잘 모르던 때 아니던가.

그 시절 태평양 건너 미국이란 나라는, 징검다리도 아닌 차들이 건너다니는 팔차선 다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지구란 같은 행성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미국에 비판적인 내가 금문교의 위용을 보며 미국의 위대함에 완전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 친구들은 뭐라 말할까.


러시안 힐의 관광명소인 롬바르드 스트릿은 5m 간격으로 굽이굽이 급경사진 길이다. ‘세계에서 가장 꼬불꼬불한 길’(The crookedest street in the world)이라고 부르는데 급경사를 커버하기 위해 1920년에 설계된 자동차 길로, 언덕을 다 내려가 거리 끝에서 높다란 언덕길을 올려다보면 화단의 꽃과 하늘의 조화가 그림 같다. 고대유적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떠올랐다. 언덕 아래 항구에 정박 중인 배들은 또 다른 설렘을 준다.

샌프란시스코는 언덕의 도시다. 언덕이 45개나 된다는데 그게 장난이 아니다. 체감으론 각도가 45도는 넘을 것 같은 급경사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바다는 언제나 눈에 들어온다. 언덕을 오르내리는 자동차와 케이블카 그리고 사람들. 가파른 언덕이 주는 느낌이 묘했다. 깐소네 ‘언덕위의 하얀 집’이란 노래도 있지만, ‘언덕위의 하얀 집’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희망과 절망이 잠시 상념에 잠기게 했다.

미국에 와 보니 부자들은 높은 언덕이나 산허리에 대저택을 짓고 사는 게 특징이었다. 굳이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말하지 않아도 부자들은 높은 곳에서 살고 가난한 자들은 낮은 곳에서 산다. 인간의 잠재의식 속엔 아래를 내려다보고 살고 싶은 욕망이 숨어있는 것 같다.

이 ‘내려다보고 살고 싶은 욕망’이 세상에 나오면 사람을 한 수 내려다보며 가르치고 명령하고 싶은 지배욕 같은 것으로 작동하리라. 아니면 위에서 군림하고 추앙 받고 싶은 권력욕 같은 것으로 작용하리라.

언덕은 우리에게 오르막과 내리막이란 인생의 굴곡을 동시에 안겨주는 자연환경이다. 그래서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하얀 집을 짓고 살고 싶은 욕망과 현실적 좌절감은 더욱 대별될 수밖에 없다. 샌프란시스코가 미국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은 도시라는 점은 아름다운 언덕과 무관하진 않으리라.

언덕은 수직이고 평지는 수평이다. 수직은 상승과 하강의 움직임 동(動)이라면 수평은 안정적으로 머무르는 정(靜)이다. 동은 활기차지만 안정감이 없고 정은 안정적이지만 활력이 없고 지루하다. 인간은 안정을 꿈꾸지만 안정을 이루면 금세 지루해 한다. 그래서 인간은 수직과 수평을 동시에 갖거나 이룰 수 없다.

LA에서 샌프란시스코 올라 갈 때는 5번 도로를 타고 내려올 때는 101번 도로를 탔다. 도로 양 옆으로 펼쳐진 아몬드나무, 체리나무, 오렌지나무, 포도나무 밭은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상상을 절(切)했다. 한국에서 보던 큰 농장이나 과수원이 아닌 우리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가름할 수 없는 크기의 규모였다. 이 황당무계한 비자연적인 풍경을 보며, 한 번도 상상해 본적이 없는 크기나 규모는 꿈조차 꿀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꿈도 환경에 의해 귀결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 본 샌프란시스코, 문명이 아무리 위대해도 자연 만큼 위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여기 짧은 여행 소감을 간단히 적어본다.

<김완수/작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