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 반성문

2017-11-13 (월) 12:00:00 마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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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반성문

마진/ 수필가

최근에 ‘엄마 반성문’이란 책을 쓴 사람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저자는 50대 중반의 초등학교 교장선생으로 직장과 가정, 자녀교육 모두에서 완벽을 추구하며 살아온 분이었다. 그분은 가르쳤던 학생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아이를 기준으로 본인의 자녀들을 키웠다고 하였다.

자녀들은 그런 엄마가 만족할 만큼 전교를 주름잡는 우등생으로 잘 커가는 듯 했다. 어느 날 순둥이였던 고3 아들이 학교를 자퇴하겠다며 목숨 건 투쟁을 하기 시작하고, 한술 더 떠서 딸은 멋대로 고등학교를 자퇴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루하루 지옥인 날들이 이어졌다.

그 지옥의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저자는 자신의 양육방식과 성공과 행복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반성하게 되었다. 또한 아이들에게는 빈둥거리는 시간과 방황할 자유가 필요함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엄마 반성문’이 자녀들을 위한다면서 정작 그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 깨달은 한 엄마의 절규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자가 자녀들을 통제한 여러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내 기억에 떠오른 한 엄마가 있었다. 그는 유명한 강남 8학군에 작은 아파트를 렌트해서 살면서 빠삭한 학원정보와 입시정보를 재산으로 두 딸을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성실하고 헌신적인 엄마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의 의견을 따라 살았다. 그는 딸들이 공부를 하는지 보아야 했기에 방문을 닫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방문은 항상 열려 있어야 했다.

나의 엄마도 기대치가 높은 분이었다. 이 정도면 잘했다 싶은 일에도 칭찬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늘 내가 좀 더 잘하고, 좀 더 예쁘고, 좀 더 완벽하기를 원했다. 나는 내가 아니고 나보다 더 잘난 누군가가 되어야만 엄마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나를 틀에 맞는 보기 좋은 상품으로 만들려고 애 쓰셨던 것을 알기에, 나는 내 딸을 절대로 어떤 주물에 부어넣는 방식으로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엄마가 튀어나오는 때에는, ‘남들이 어떻게 볼까가 그렇게 중요해요?’ ‘열심히 했는데 이런 걸 어쩌라고!’ 하면서 딸은 다행히도 일찌감치 저항을 했다.

나는 딸을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사교육의 광풍 속에서 공부를 잘하나 못하나 다들 학원에 다녔다. 말이 사교육이지 그저 남보다 먼저 선행학습을 하는 것이었다. 학교 선생님들이 학원에서 다 배웠거니 전제하고 수업을 하면 딸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미국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딸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딸이 대학원서를 어디 넣겠다고 했을 때, 그 유명한 대학들에는 안 넣느냐고 한 마디 했다가, 안 그런 척했지만 엄마도 결국 자식 학벌로 으쓱하고 싶어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다시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자녀들은 부모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으로 자란다는 말이 있다. 앞으로는 관용과 이해의 말을 해도 자녀들은 부모의 진심과 기대를 간파하고 거기에 부응하려고 갈등한다.

사랑에 대한 숱한 정의가 있지만, 내가 늘 되새기는 건 “사랑은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반응할 자유를 주는 것”이라는 헨리 뉴엔의 책에서 읽은 한 줄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반응할 자유를 주는 것, 그러나 자유인이 되어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여전히 힘든 과제이다. ‘엄마 반성문’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마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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