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돈을 버는 능력, 쓰는 지혜

2017-11-11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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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많은 걱정을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은 해본 적이 없다. ‘돈을 어디에 써야하나’ 하는 걱정이다. 돈을 벌기도 전에 쓸 곳이 기다리고 있으니 걱정할 틈이 없다. 들어오고 나가기를 바로 바로 반복하는 건강한 순환구조이다. 다른 말로 하면 월급봉투에서 월급봉투의 삶이다.

미국에서 최고부자 3명의 재산이 전 국민 중 소득하위 50%의 재산보다 많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워싱턴 D.C.의 진보성향 싱크탱크인 정책학 연구소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빌 게이츠, 워렌 버핏, 제프 베조스 3명이 가진 재산(총 2,485억 달러)은 국민의 절반인 1억6,000만 명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 부의 집중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정책학 연구소는 포브스가 9월 중순 발표한 미국의 400대 부자 자료를 토대로 집계했는데, 10월 말이 되자 3명 부자들의 재산은 더 늘어 2,630억 달러가 되었다. 아마존 주가 상승으로 베조스의 재산이 한달 반 사이 130억 달러나 뛰어오른 것이 주 원인이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세상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 되면서 생겨난 기현상이다. 포브스가 400대 부자 선정을 시작한 1982년 400번째 부자의 재산은 1억 달러였다. 그것이 2017년에는 20억 달러로 뛰어올랐다. 그 35년 간 미국의 가구당 중간소득은 인플레 감안, 오히려 3% 떨어졌다.

저마다 눈사람(재산)을 만드는데, 한쪽에서는 태산만한 눈덩이를 굴리고, 다른 쪽에서는 조막만한 눈덩이를 굴리는 격이다. 몇몇 태산 같은 눈덩이들이 눈을 싹쓸이하고 나면 한주먹짜리 눈덩이들은 굴리고 말고 할 것도 없게 된다. 부는 극소수 가진 자들이 독점하고 경제적 불평등의 골은 기하급수적으로 깊어진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은 지난 2014년 1월 세계 최고 갑부 85명이 가진 재산이 전 세계 소득하위 50%인 35억 명이 가진 재산과 맞먹는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불과 3년 후인 2017년 1월 옥스팜의 발표는 더욱 놀랍다. 더 이상 80여명이 아니다. 최고부자 단 8명이 보유한 재산(4,260억 달러)이 세계 인구의 절반인 36억명이 가진 재산(4,090억 달러)보다 많다.

이런 속도로 부가 어느 한 주머니에 집중된다면 앞으로 25년 후 인류사상 최초로 1조 달러 자산가가 등장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1조 달러’란 “매일 100만 달러씩 쓰면 2,738년 걸리는 액수”이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면 그는 인류사상 최고로 행복해야 할 것이다. 다행이도 돈과 행복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니 그나마 세상은 공평하다.

돈은 두 단계로 우리와 인연을 맺는다. 버는 단계 그리고 쓰는 단계이다. 열심히 벌어서 재산을 늘리며 소유욕을 만끽하는 것이 첫 단계이다. 대부분 은행구좌의 숫자만 봐도 행복해진다. 더하기만 하면 된다.

돈으로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두 번째 단계이다. 그달 벌어서 그달 쓰는 서민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어느 정도 부자가 되고 나면 쓰는 일이 간단하지가 않다. 고가의 물건들을 사며 누리는 기쁨도 잠깐이고 제한적이다.


중국, 알리바바 그룹의 잭 마 회장이 재미있는 말을 했었다. “100만 달러를 벌면 돈복을 타고 난 것, 기분 좋은 수준이다. 1,000만 달러를 벌면 문제가 생긴다. 골치가 아파진다. 10억 달러 이상을 벌면 그때부터는 (사회적) 책임이 주어진다”고 그는 말했다. 어디에 어떻게 투자해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 스트레스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한편 쌓아만 놓고 도무지 쓰지를 못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버는 단계만 있고 쓰는 단계가 없다.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돈이 상전이 되는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지인 중에 재정전문가가 있다. 한인사회의 부자들 중 돈을 벌 줄만 알뿐 쓸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그는 말한다. 평생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재산으로 그는 200만 달러 정도를 잡는다. 그 이상 번 돈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쓸 수 없는 돈, 상속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만 높아져 오히려 해가 되는 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돈에 매여 점심 한번 여유롭게 먹지 못하는 부자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은행잔고로는 백만장자, 삶은 지지리도 궁색한 가난뱅이들이다.

돈을 버는 것이 능력이라면 쓰는 것은 철학이고 지혜이다. 벌기와 쓰기 모두를 잘 할 때 진짜 부자가 된다. 게이츠와 버핏이 대표적이다. 한인사회에서는 수백만 달러 재산이면 게이츠이고 버핏이다. 우선 나와 가족을 위해서 품위 있게 쓰고, 이웃을 위해 쓰고, 커뮤니티를 위해 쓰는 멋진 부자, 품이 넓은 부자들을 보고 싶다. 벌어놓은 돈을 쓸 날이 그리 많은 게 아니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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