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뱀피르’

2017-11-03 (금)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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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피르’
덴마크의 엄격한 감독 칼 테오도어 드라이어의 분위가 스산한 ‘뱀피르’(Vampyr·1932·사진)는 걸작 초기 흡혈귀영화 중의 하나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에 최면에 걸린 것 같은 분위기와 혹독할 정도로 꾸밈이 없고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영상을 갖추어준 괴이하도록 아름다운 작품이다. 드라이어의 또 다른 걸작으로는 영화사에 길이 남는 마리아 팔코네티 주연의 ‘잔 다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1928)이 있다.

‘뱀피르’의 잿빛 몽상과도 같은 영상은 헝가리 태생의 촬영감독으로 유럽서 활동하다 후에 할리웃으로 옮겨 촬영을 거쳐 영화감독으로 활약한 루돌프 마테의 솜씨다. 마테가 할리웃에서 감독한 영화들은 ‘D.O.A.’ ‘낙인’ ‘유니언 스테이션’ ‘도둑왕자’ 및 ‘미시시피 도박사’ 등이다. ‘뱀피르’는 드라이어의 첫 유성영화로 카메라 및 편집기술과 함께 다양한 음향효과를 써 꿈과 같은 공포무드를 조성하고 있는 73분짜리 작품. 움직이는 그림자와 빛의 명암을 극적으로 사용해 보는 사람을 악몽으로 몰아넣는데 세트는 독일 표현주의영화 ‘닥터 칼리가리의 관’(The Cabinet of Dr. Caligari·1919)을 연상케 한다.

내용은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젊은이가 파리 인근의 한 마을에 들렀다가 겪는 초현실적이요 불길한 현상과 악마적 현실이 뒤섞인 경험을 그렸다. 서서히 움직이는 안개와 죽음을 전조하는 큰 낫 그리고 불길한 메아리 등이 보는 사람의 감관을 두려움으로 감싸 안는다. 출연은 제작비를 댄 사람과 대부분 감독이 촬영현장에서 고른 사람들이 했는데 독일어 등 3개국어로 녹음했다. ‘뱀피르’가 최근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복원된 독일어판 블루-레이로 나왔다.

무성영화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만들어지고 있는 흡혈귀영화의 매력은 무엇인가. 우선 그 것은 우리 내면에 잠복한 어두운 욕망이 갈구하는 공포와 변태성을 충족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흡혈귀의 색깔이라 할 블랙은 감각적이요 퇴폐적이고 염세적이며 또 야수적으로 그 것은 두려움과 저주 그리고 비밀과 죽음을 품고 있다. 이런 성질은 모두 우리가 탐하거나 피치 못할 것들이다.


검은 망토를 걸친 드라큘라는 밤에만 활동하는 사체이지만 매우 인간적이다. 그에겐 백작 칭호가 달려 있는데다가 초인의 능력을 지녀 어둠의 수퍼맨이라 부를만하다. 또 이 고독한 남자는 아름다운 여인에 집착하는 로맨틱한 정열파다. 그리고 그는 치명적인 성적 매력을 지녔다. 그 성적 매력은 악마적인 것으로 아무래도 성적 매력이란 어두워야 제 가치를 발휘하게 마련이다. 여자들이 ‘암흑의 왕자’라 불리는 드라큘라에게 자기 목을 서슴없이 내어주는 까닭을 알만하다.

그런데 드라큘라의 사랑은 저주받은 국외자의 것이요 반드시 피를 봐야하는데다가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간절하고 비극적이다. 그래서 그가 사랑을 못 이룬 채 인간에 의해 타살되며 내지르는 한과 고통의 비명을 듣게 되면 이 밤의 신사에게 깊은 연민의 정마저 갖게 된다.

브람 스토커의 소설이 원작인 드라큘라영화의 고전 중 하나인 유니버설사 작품 ‘드라큘라’(Dracula·1931)는 헝가리 태생의 주연 벨라 루고시를 공포영화의 빅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다. 그는 강한 액센트와 함께 천천히 대사를 구사하면서 압도적이요 초연한 연기로 흡혈귀의 신비감과 저 세상 같은 분위기를 완벽히 보여주었다. 그의 후배 드라큘라들로 크리스토퍼 리, 프랭크 란젤라, 잭 팰랜스 및 탐 크루즈 등이 있지만 지금도 루고시는 드라큘라와 동일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수 많은 흡혈귀영화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독일의 명장 F.W.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노스페라투’(Nosferatu·1922)다. ‘노스페라투’는 흡혈귀의 루마니아어. ‘공포의 심포니’(A Symphony of Horror)라는 부제가 붙은 이 영화는 빛과 그림자와 조명 그리고 카메라의 동작을 통해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명작이다.

특히 꿈에 볼까봐 겁이 나는 흡혈귀 올록백작(막스 슈렉)의 모습은 욕지기가 날 정도로 추하다. 역대 드라큘라 중 가장 추남으로 쥐 같은 얼굴에 해골처럼 마른 몸과 길고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독수리 발톱을 닮은 야위고 긴 손가락을 한 그는 세균을 온몸에 묻히고 다니는 악의 화신과도 같다.

독일의 또 다른 명장 베르너 헤르조크가 ‘노스페라투’를 치하하면서 리메이크한 ‘노스페라투 흡혈귀’(Nosferatu the Vampyre·1977)도 내가 좋아하는 흡혈귀영화. 독일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가 드라큘라로 그의 희생물 루시 하커로는 프랑스의 따갑도록 아름다운 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나온다. 특이한 것은 드라큘라가 좋은 흡혈귀라는 점. 드라큘라는 루시를 사랑해 상사병에 걸리는데 그가 시름에 빠져 축 늘어져 있는 측은한 모습을 보자니 동정심마저 간다. 사랑엔 흡혈귀도 속수무책이로구나. 이 작품은 화사한 수채화 같은 칼러영상과 함께 시적 분위기를 지닌 아름다운 공포영화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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