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야만의 시대는 저무는가

2017-10-21 (토) 권정희 논설위원
작게 크게
한국의 중견배우 문소리(43)가 ‘꽃’에 관한 말을 했다. “어느 시상식에 갔는데 ‘여배우는 영화의 꽃’이라고 표현하더라, 그 말이 꼭 좋게만 들리지는 않더라”며 ‘꽃’ 표현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지난 주 부산국제영화제 행사의 하나로 일본 여배우 나카야마 미호와 공개대담을 하던 중 나온 말이었다. 최근 문소리는 각본부터 감독, 주연까지 맡아 ‘여배우는 오늘도’ 라는 영화를 만들어 주목을 받고 있다.

“여배우는 왜 꽃이어야만 할까. 배우로서 열심히 일하면서 거름도 되고, 열매나 뿌리, 줄기도 될 수 있는 게 아닌가”라는 말이었다. (여배우들이)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영화계가 건강해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배우답게, 프로답게 그는 시종일관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웃고 있는 그의 얼굴 뒤로 내면에 억눌려 있을 분노나 좌절이 느껴진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여성이다. “꽃이 어때서? 영화의 꽃이라면 좋은 거 아닌가?” 한다면 필시 당신은 남성이다. 세상에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물고기가 느끼는 감정을 인간이 알 수는 없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아픔 특히 그것이 여성으로서 몸에 관련된 경험일 때, 여성이 느끼는 감정은 남성에게 물고기의 감정만큼이나 멀다.

할리웃의 유명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이 영화계가 아닌 여권운동사에 이름을 남길지도 모르겠다. 지난 5일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그의 30년 성적 비행이 폭로된 후 여성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에 해시태그 #MeToo(나도) 포스팅이 폭주하며 어떤 연대의식이 형성되고 있다.

여성이 ‘꽃’인 것은 영화계뿐이 아니다. 과거 남성일색이던 모든 직종·직장에서 여성은 ‘꽃’이고, 남성문화 지배하에 남성이 권력을 잡고 있는 구도에서 ‘꽃’들의 수난은 일상적이다. 성희롱·성추행은 이 사회 곳곳에서 다반사로 일어났다. 피해자들은 수치심에 혹은 직업적 보복이 두려워 대부분 입을 다물었고, 입을 열었던 소수는 조직적 응징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들 피해여성이 지금 해시태그 ‘미투’라는 집단의 힘에 기대 침묵을 깨고 문제를 공론화하고 있다.

권력 가진 남성들의 성희롱·추행 스캔들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 수많은 사건들이 문제로 떠오르지도 않고 묻혔을 것이다. 해묵은 비행이 폭로되고 가해 남성들이 벌을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전부터이다. 자상한 ‘국민 아버지’였던 빌 코스비, 팍스 뉴스의 로저 에일스 회장과 인기 앵커 빌 오라일리가 추악한 이면이 드러나면서 근년 줄줄이 추락했다. 대중은 충격 받고 분노하고, 그리고는 잊었다. 문제는 공론화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 성희롱·추행을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와인스틴 케이스의 파장이 큰 것은 피해 여성들이 ‘아는 얼굴’이라는 사실과 상관이 있을 것 같다. 앤젤리나 졸리, 애슐리 저드, 그위니스 펠트로 등 친숙한 배우들이 ‘나도 당했다’고 나서니 내 자매, 내 친구의 일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각자 내밀하게 묻어두었던 폭행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수문이 열리고, 둑이 터지듯 ‘미투’의 물결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영화계에 이어 ‘우리도 당했다’고 나선 것은 북가주의 새크라멘토 주의사당이다. 주의원, 로비스트, 정치 보좌관, 사무직원 등 주 의사당에서 일하는 여성 140여명이 성명을 발표했다. 점잖은 의원들이 일하는 그곳에서도, 여성의원에게조차도 성적으로 모욕당하고 희롱당하는 일은 만연해있다는 공개서한이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여성들을 희롱하고 추행하는 것을 권력가진 자의 특권으로 자랑하는 남성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나라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한 문제는 이어질 것이다. 연구결과들을 보면 어떤 조직에서 고위직의 여성 비율이 30%가 되면 남성중심의 문화가 바뀌기 시작한다. 가주의회의 경우 전체 의원 120명 중 여성의원은 26명으로 1/4이 채 못 된다. 성희롱 문화가 개선되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하겠다.

20세기 초반 여권운동에서 큰 힘을 보탠 것은 의식있는 남성들이었다. 남성들이 나서야 남성중심의 문화가 바뀐다. 미투 해시태그에 이어 남성들이 #IHave(내가 그랬어), #ItWasMe(나였어) 해시태그 포스팅을 시작한 것은 반갑다.

남성들이 성희롱·추행 이슈에 좀 더 민감해지기를 바란다. ‘손버릇’ 나쁜 동료나 상사를 ‘원래는 좋은 사람’이라며 눈감지 말아야 한다. 농담 삼아 던진 한마디, 친근감을 빙자해 더듬은 손길이 상대 여성에게는 인격이 모독당하는 고통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묵인하고 용납하며 만든 사회에서 우리의 딸들이 산다. 야만의 시대는 저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권정희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