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불속에서도 타지 않는 것

2017-10-14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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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로 바닥까지 타버린 집들, 잿더미가 된 동네들을 보면서 오래 전 한 지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모두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내 것이 아니더군요.”

사업에 실패해 재산을 모두 날렸던 아픔을 그는 담담하게 회고했다. 사업이 한창 번창했을 때 집을 늘리고, 미술품 등 고가의 물건들을 사들이면서 그는 그 재산이 ‘내 것’이라는 데 한 치의 의심이 없었다. 열심히 일해서 장만한 소유물들이니 ‘내 것’이 아닐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업이 흔들리더니 모아 놓은 모든 것들이 모래성 무너지듯 사라졌다고 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 모든 것은 잠시 곁에 머물 뿐, 영원한 ‘내 것’은 없다는 의미였다.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리는 뼈아픈 상실감은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닥치는, 삶의 보편적 경험이다.


수확의 계절이어야 할 가을이 처참한 상실의 계절이 되었다. 한달 전에는 물이 휩쓸더니 이번 주에는 불이 휩쓸고 있다. 지난 8일부터 동시다발로 일어난 대형 산불들로 캘리포니아가 비상사태를 맞았다.

남가주 오렌지카운티 산불은 며칠 사이 진화가 되었지만, 북가주 산불은 언제쯤 불길이 잡힐지 아직 알 수가 없다. 17개의 산더미 같은 산불들이 나파와 소노마 등 8개 카운티를 초토화하면서 33명이 목숨을 잃고 3,500채의 가옥이 전소되었다. 수백명이 행방불명이어서 가족친지들이 애를 태우고 있고, 수만명이 집 떠나 대피소에서 호텔에서 친지 집에서 가슴을 졸이며 피난 중이다.

시뻘건 불길 넘실대고 연기 자욱한, 전쟁터 같고 묵시의 공상과학 영화 같은 산불현장에서는 한 순간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극한 상황들이 펼쳐졌다. 피해가 가장 심한 샌타 로사에서는 시니어 모빌홈 팍에 화마가 덮쳐 160채 트레일러 거의 모두가 소실되었다. 대부분 고령인 주민들이 안전하게 대피를 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집이 완전히 불타버린 85세, 87세의 노부부는 딸의 도움으로 피신은 했지만 평생 익숙하던 모든 것을 잃고 고령에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

나파 밸리에서는 100세 노인과 98세 부인이 대피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고향 위스콘신에서 초등학생 때 만나 평생을 같이 지내온 부부는 얼마 전 결혼 75주년을 기념하고 이번 불로 나란히 세상을 떠났다. “한분만 떠났다면 다른 한분은 살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71세의 아들은 말했다.

‘불타 죽느냐 얼어 죽느냐’를 선택해야 했던 부부도 있다. 샌타 로사 인근 산 위에 살던 존(70)과 잰(65) 부부는 8일 밤 ‘대피하라’는 딸의 전화를 받았지만 ‘조심하라’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었는데 자정 무렵부터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서둘러 자동차를 몰고 산 아래로 내려갔지만 중간에 차를 돌려야 했다. 불길이 가로 막아 더 이상 내려갈 수가 없었다.

다급해진 부부는 이웃 집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곧이어 그 집에 불이 붙으면서 나뭇가지와 다른 물체들이 불덩어리가 되어 날아드는 동안 부부는 물속에 잠수해서 불을 피했다. 숨 쉬기 위해 얼굴을 물 위로 내밀면 열기를 견딜 수 없었고, 수영장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집이 다 타고 불이 꺼지기까지 6시간이 걸렸다. 온통 물에 젖어 맨발로 걸어 집으로 가보니 집은 형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몸에 걸친 옷가지뿐. 화가인 남편의 수십년 작품들 역시 모두 재로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잃었다. 이 세상 무엇보다 확실하게 존재했던 ‘내 것’ ‘우리 집’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집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다.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온 삶의 근원, 정겨운 물건들이 그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대체 불가능한 곳이다. 이 모두가 불탄 쓰레기더미로 바뀐 현실에 이재민들은 한동안 혼란스러울 것이다, 상실감은 깊고 고통은 오래 갈 것이다.

불타 사라지는 것들을 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소유의 덧없음이다. 불붙으면 화르르 타버릴 것들을 얻느라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지는 않은가. 집 페이먼트 하느라 일에 묶여 정작 집에서는 편안하게 앉아보지도 못하고, 아이들 교육 위해 돈 버느라 아이들과는 이야기할 시간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소유지향의 삶이 초래하는 아이러니이다.

상실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무엇이 중요한지가 보인다. 불이 나도 타지 않을 것에 비중을 두어야 하겠다. 소유 대신 존재, 물건 대신 사람에 무게를 두는 삶이다.

괴테는 시 ‘재산’에서 말한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영혼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막힘없는 생각과/ … /모든 호의적인 순간들만이 나의 차지이다.”

‘내 것’은 오직 깊은 생각과 풍성한 경험 - 소유를 덜어낼수록 존재는 확장된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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