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윤이상 회상

2017-10-14 (토) 나영욱/미주방송인협회 수석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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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4월 샌프란시스코의 한 한인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던 필자는 한 청취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독일에 살고 있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씨와 전화 인터뷰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분과 친분이 있는데 들리는 얘기는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니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당시 그의 나이 77세. 과거에도 그와 인터뷰를 했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알려졌다시피 그는 지독한 반한인사였으므로 선뜻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는 미국, 더군다나 그는 거의 80세에 육박하는 노령이고 또 건강이 나쁘다고 하지 않나? 정말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인터뷰는 성사됐다. 북한의 우상으로 추앙받던 윤이상이니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통화에서 그는 자신을 가리켜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라고 표현했고, 대한민국에 대해 느끼는 증오는 대단한 듯 했다.


그는 ”내 고향 남쪽바다 통영에 가고 싶다. 눈앞에 푸른 물결이 넘쳐나는 것을 상상하면 미칠 지경이다. 그런데도 나는 고향에 갈 수 없다. 독재정권이 밉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그의 계속된 북한 찬양으로 윤이상씨는 여전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계속된 인터뷰에서 그는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당신 같은 음악인이 왜 그 이상한 북한을 찬양하느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나도 처음에는 동백림 간첩사건 때 정보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한 적개심으로 북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들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나는 천성이 반골이라 그런지 평소에도 부당한 것을 보면 도저히 참지를 못한다. 옛날 자유당 정권 말기 명동 시공관에서 자유예술인대회라는 정부주관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에 당시 기세등등했던 실세 공보실장 갈홍기씨가 축사를 했다. 그가 축사를 마치고 식장을 떠나려고 할 때 당시 작곡가협회 간부였던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유당 정권은 예술인을 탄압하지 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갈홍기 공보실장은 잠깐 놀란 듯 나를 쳐다보더니 싱긋 한번 웃고 손을 흔들며 식장을 빠져나갔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주위에 있던 동료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지만 그 후 어떤 뒤탈도 없었다며 “아마도 박정희 시대였으면 정보부에 끌려가 죽도록 맞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필자가 윤씨에게 ”당신이 갈홍기씨에게 소리쳤듯이 북한에 가 김일성 앞에서 그렇게 외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윤씨는 ”그럴 수는 없지“라고 했다. 그래서 필자가 ”그것이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차이가 아닌가?“했더니, 윤씨는 ”운명이 내 마음대로 되나. 베토벤은 운명에 항거했지만 나는 그 정도는 못 돼“라는 대답으로 인터뷰를 끝냈다.

2007년 여름인가, 윤이상씨 부인 이수자씨가 40년 만에 고국인 한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청와대로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했고, 이 자리에서 그녀는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렸다. 이 장면을 신문에서 본 필자는 묘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 큰 절의 의미는 무엇일까?

당시 그녀의 나이 90세. 옛날 할머니라서 대통령을 왕으로 착각한 것일까, 아니면 아마도 같은 코드인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의 주인으로 자신을 맞아주니 감격해서 그런 것일까.

역시 같은 코드의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 전 독일을 방문했을 때 윤이상씨의 묘소를 참배하고 통영의 상징인 동백나무까지 심어준 것을 보면 “윤씨와 남북이 얽힌 인연은 참으로 모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나영욱/미주방송인협회 수석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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