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수증’이 재미있는 이유

2017-10-09 (월) 김장원 / 공학박사
작게 크게
미국에서 9년째 살고 있지만, 아직도 미국 방송보다 한국 방송을 더 많이 보는 편이다.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방송이 더 재미있고 더 많이 공감된다.

요즘은 <김생민의 영수증>을 보고 있다. 개그맨 김생민, 송은이, 김숙이 진행하는 15분짜리 프로그램이다. 팟캐스트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팟캐스트 최초로 지상파 TV에 편성되었다.

프로그램에서 김생민은 시청자가 한 달간 소비한 내용(영수증)을 조목조목 살펴보며 무엇을 잘 했는지, 무엇을 못했는지 지적한다. 잘 했으면 ‘그레잇(great)!’, 못했으면 ‘스튜핏(stupid)!’을 날린다. 예를 들면, 지하철 요금에는 ‘그레잇’, 택시 요금에는 ‘스튜핏’, 책값에는 ‘그레잇’, 고가의 TV에는 ‘스튜핏’을 날린다. 한국에서는 ‘그레잇’과 ‘스튜핏’이 유행어가 되었다.


영수증을 보낸 사람이 보통 김생민보다 나이가 적기 때문에 자칫 꼰대질로 보일 수도 있을 텐데,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오히려, 여러 가지 긍정적인 감정(공감, 위로, 카타르시스, 뿌듯함)을 느끼게 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대-30대 청년들이 보낸 영수증에는 그들의 생활, 고민, 노력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더라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공감이 많이 된다. 영수증에는 월세, 청약저축, 주택 모기지 등이 자주 나온다. 한 달 수입에 비해 꽤 큰 비용이다.

최근 나의 관심사 중 하나도 내 집 마련이다. 미국에서 정착해 살려면 내 집이 있는 게 좋다고들 하거니와, LA의 렌트비는 지난 몇 년간 끝을 모르고 오르고 또 올랐다. 집값도 마찬가지다. 나와 아내는 계산기 두들기며 계획을 세웠고, 가계부도 써보고, 고작 1.15% 이자율의 저축도 하고 있다. 하지만 소위 학군 좋은 동네에 집을 사는 건 언제쯤 가능할지 모르겠다. 저축하는 돈보다 집값이 더 빨리 올라가는 느낌이다.

최근 방송에서는 청약저축에 한 달에 5만 원씩 넣고 있는 영수증이 나왔다. 김생민은 이 항목에 힘차게 큰 박수를 보내면서 ‘그레잇’을 날렸다. 그 영수증의 주인은 많다고 할 수 없는 월급을 쪼개가며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적금을 들고 있었다. 거기에 매달 부모님께 20만 원씩 용돈까지 드렸다. 여기서 또 한 번 시원하게 ‘그레잇’.

그러고 보니, 김생민은 가족, 절약, 신앙, 성실 등 삶에서 기본이 되는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어렵지만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청년들을 아낌없이 응원한다. 듣는 내가 속이 시원할 만큼.

한편, 그 가치를 소홀히 여기면 가차 없이 ‘스튜핏’을 날리며 지적한다. 택시 금지 등의 엄벌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평생이 아니라 대출금을 갚을 때까지이고, 그때까지의 20여 년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오랫동안 그 가치를 지키며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여름에도 차 안에서 에어컨을 안 틀었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은 땀을 흘려야 면역력이 좋아지는 체질이고, 땀에 흠뻑 젖어서 차에서 내리면 개운해서 기분 좋다고 한다. 웃플(웃기지만 슬플) 수 있는 일화이지만, 그는 소신 있고 분수에 맞게 살아온 시간이 주는 힘을 바탕으로 긍정적 에너지를 아낌없이 전한다.

최근 그는 최고 시청률의 인기 프로그램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제 1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나처럼, 커피 한 잔 사 먹는 걸 참으면서 ‘이거 하나 못 사 먹나’ 하는 부정적 생각보다는, 미래를 향해 조금 더 나아갔다는 뿌듯함을 느낄 것 같다.

<김장원 / 공학박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