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이 캔 스피크'

2017-09-30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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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라는 한국영화가 LA에서 상영되고 있다. 직역을 하면 ‘말을 할 수 있다’ 이지만 그 보다는 영화포스터의 문구,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가 더 정확한 의미일 것 같다. ‘절대로 할 수 없었던 말, 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말, 그러니 이제 말해야겠다, 말할 수 있다’라는 절절함이 담겨 있다.

28일 ‘아이 캔 스피크’ 시사회가 있었다. 지난 22일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에 참석한 후 남가주를 방문 중인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88) 할머니를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내 이야기’나 다름없는 영화를 본 후 할머니는 아파하고 감동했다. 배우 나문희 씨의 말과 동작 하나 하나가 ‘내 말, 내 동작’ 같아서 아픔이 되살아났고, 오랜 세월 없는 듯 묻혀있던 위안부 피해 역사가 이제는 잔잔하게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영화는 시장 통에서 옷 수선가게 하며 사는 할머니와 구청의 9급 공무원 청년이 만나면서 시작된다. 사소한 인연도 없어 보이던 두 사람은 영어에 대한 할머니의 못 말리는 학구열로 인연의 매듭이 시작되고, 할머니가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영어를 배워서 기어이 ‘아이 캔 스피크’ 해야 했는지 그 배경이 드러나면서 혈육같이 단단한 인연으로 막을 내린다.


‘아이 캔 스피크’는 지난 2007년 2월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들이 워싱턴 연방의사당에 가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사실을 증언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다. 일본이 절대로 인정하지 않던 사실을 미 전국에, 그래서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이지만 ‘역사’는 아직도 미완이라고 이용수 할머니는 말한다. 영화 관람 후 할머니는 “지금이 시작이라고 본다”는 말을 되뇌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말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입을 열어 말을 하기 까지는 근 50년이 걸렸다. 1928년 12월생인 그는 만으로 15살이 채 안되던 때 위안부로 끌려갔다. 1943년 10월이었다. 고향인 대구 집에서 잠을 자려는 데, 친구가 놀러가자며 뒤 창문으로 불러내 따라 나간 것이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기차에 실리고 군함에 실리며 머나먼 길을 끌려가서 내려진 곳은 대만의 가미가제 공군기지였다. 수없이 폭행당하고 칼로 자상 당하고 전기고문까지 받으며 지옥 같은 나날이 계속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송환선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들에게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딸이 갑자기 없어지고 영 소식이 없자 필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거지 몰골을 하고 돌아온 딸을 본 어머니는 ‘귀신’이라며 쫓아내더니 충격에 몸져누웠다.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입을 열수는 없었다.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되는 치욕의 과거로 혼자 삭여야 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내가 피해자였다’고 말을 한 것은 1992년이었다.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후 위안부 피해 신고센터가 개설되고 정부가 피해자 등록을 받기 시작했다. 피해자 모임에 나가면서 그는 처음으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잘못해서” 혹은 운이 나빠서 당한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수많은 여성들이 당한 거대한 반인륜적 범죄라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일본 육군성 주도 하에 위안소가 본격적으로 설치된 1937년 말부터 1945년 종전까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여성은 2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군인들의 성 노예로 짐승 같은 생활을 하다가 많은 수가 전쟁 중 죽었고, 종전 후 또 많은 수는 수치심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 했고, 고향으로 돌아온 많은 수의 여성들 역시 스스로를 감추거나 가족들에게서조차 배척당하며 죽은 듯 살아야 했다. 고통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이용수 할머니는 ‘절대로 할 수 없었던 말’을 말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기회만 닿으면, 세계 어디든 다니며 말을 한다.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2007년 연방하원 청문회에 함께 갔던 김군자(89) 할머니도 7월말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일본이 공식적으로 죄를 인정하고 사과하기를, 그래서 우리가 용서할 수 있기를” 바라던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없다. 한국정부에 공식 등록된 피해자 239명 중 35명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다급한 외침이 되고 있다.

2007년 연방하원 결의안 제1 조항은 말한다. “일본 정부는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에 이르기까지 …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강제로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알려진 성의 노예로 만든 사실을 확실하고 분명한 태도로 공식 인정하면서 사과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10년이 지난 지금껏 일본은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 캔 스피크’를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어받을 때가 되었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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