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역은 반역이다”

2017-09-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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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 발언 때문에 소동이 빚어진 적이 있다. 한국 언론들은 바이든 부통령이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을 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며 중국을 겨냥한 발언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언론들은 사설을 통해 “무례하다”며 비판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 보도는 통역의 오역에 의한 오보였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바이든의 발언을 그대로 옮겨보면 “It‘s never been a good bet to bet against America”였다. 이 말은 “미국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고 번역하는 게 맞다. ’bet against‘는 ‘무엇 무엇에 대해 신뢰하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미국의 약속을 믿어달라는 의미로 이런 발언을 했다. 그런데 이 발언이 한국에 대한 경고로 둔갑된 것이다. ‘bet’을 베팅으로 번역한 통역과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언론의 무책임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오역에 의한 한국 언론들의 오보 사례는 부지기수다. 언론이 다루는 영역이 갈수록 넓어지고 외국 언론보도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지면서 정확한 번역의 중요성은 그만큼 커지고 있다. 하지만 잘못된 번역으로 본래 의미를 훼손하거나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보도들이 너무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도 그동안 나온 오역 기사들은 지난 주말 나온 오보에 비하면 그나마 이해해 줄만한 수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7일 한미정상 통화를 마친 후 자신의 트위터에 “I spoke with President Moon of South Korea last night. Asked him how Rocket Man is doing. Long Gas lines is forming in North Korea. Too bad!!”라고 올렸다. “지난 밤 한국 문 대통령과 통화했다. 요즘 로켓맨(김정은)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 기름을 얻으려고 북한에 긴 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딱하다”고 북한을 비꼬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한 언론이 이를 보도하면서 기름을 얻으려고 늘어선 장사진을 뜻하는 ‘Long gas line’을 ‘가스관’으로 번역했다. 오역에 한술 더 떠 문 대통령이 블라디보스톡에서 했던 “앞으로 남북관계가 풀리면 북한을 경유한 가스관이 한국까지 오게 될 것”이라는 발언을 언급하며, 트럼프가 문 대통령 구상을 ‘Too bad’(유감이다)라며 비판했다고 친절한 해석까지 곁들였다.

원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 더해 자신들의 견해까지 담아 보도한 것이다. 다른 언론들이 앞 다퉈 받아썼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오역에 의한 오보였음이 곧바로 드러났으며 해당 언론들은 기사를 황급히 내리는 촌극을 빚었다. 청와대는 유감 표명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번역도 엉터리였지만 오역의 원천이 된 원문 또한 엉터리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 가디언지는 트럼프가 “북한에서 주유하려고 길게 줄을 서고 있다”고 언급한 것은 주민들 대부분 승용차가 없는 북한에 대한 그의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혹평했다.

트럼프 트윗 오보 해프닝은 두 단계의 무지를 거치면 사실이 얼마나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번역의 어려움을 빗대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까지 생겼지만 번역이 반역이 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잘못된 번역으로 뜻을 왜곡한다면, 특히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할 저널리즘의 본령이 오역으로 인해 훼손된다면 그것은 공익과 국익을 위협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저널리즘의 오역에 대해서는 반역이라 불러도 크게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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