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비워내기

2017-09-20 (수) 09:20:33 정한아(BAKI 카운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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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옷을 모아서 세탁하곤 한다. 셔츠는 일괄적으로 이날 한꺼번에 다리곤 하는데 오늘은 쌓여있는 옷을 보니 별안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요즘 나를 힘들게 하는 허리통증까지 심해지면서 내가 이걸 도대체 왜 하고 있나 싶었다. 그러면서 바라본 옷 바구니의 세탁이 끝난 옷들과 이미 옷장 가득 꽂혀있는 옷들을 보니 숨이 턱하고 막혔다.

빙 둘러본 집안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못해 물건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며 이 많은 물건이 어떻게 이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과연 이 중에 내가 꼭 필요한 물건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근 10여 년간 여러 룸메이트를 거쳐오면서 침대와 현재 쓰고 있는 책상 및 몇몇 중고가구를 제외하곤 그 누군가가 두고 간 주인을 잃어버린 물건들이었다. 물론 수차례 이사를 통해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버리거나 기부를 통해 정리한 물건의 양도 꽤 되긴 하지만 여전히 가득 차 있는 공간을 보며 나한테서 문제를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나이가 들면 개인의 취향이 깃든 값어치 있는 몇 가지 물건만 소장하고 있는 그런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진 어른으로 거듭날 거라는 나의 소싯적 기대와 현재의 나의 모습은 상당히 거리가 있다. 게다가 이 많은 물건을 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돈을 버는데 할애하고 또 보관 관리하기 위해 쓰고 있는 체력적 노동 시간을 더하니 나는 그저 물건 사이에 갇혀 사는 노예 같았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물건더미 속에서 살아온 것일까? 아무래도 그건 미국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한국에 살 때는 가끔 필요한 물건이 생길 때만 품질이 좋은 물건은 하나 사서 아껴서 오래 쓰는 소비를 했다면 미국으로 온 이후로는 세일 때마다 필요와는 별개로 세일이라 싸다는 생각만으로 물건을 사들였고 세일은 일 년 내내 계속됐다.

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옷과 한 번도 신지 않은 신발, 가발, 모자 등을 쓰레기봉투에 담으니 세 봉지가량이 나와 바깥으로 버리려고 내놨다. 나는 그저 순간의 허전함과 불안감을 잊기 위한 자가 치료제로 물질적 소비에 집착했던 거 같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김생민의 영수증’이라는 팟캐스트가 유행인데 신청자의 한 달 수입과 지출 내용을 가지고 김생민에게 경제적 조언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그의 말처럼 나 자신도 소비관념 스튜핏에서 강한멘탈 그레잇으로 거듭나는 날을 희망해 본다.

<정한아(BAKI 카운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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