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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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토왕성폭포, 구름 뚫은 물기둥… 전설의 비룡을 보는 듯

2017-09-01 (금)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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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토왕성폭포, 구름 뚫은 물기둥… 전설의 비룡을 보는 듯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설악산 토왕성폭포가 장엄하게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다. <속초=최흥수기자>

봄 가뭄을 만회라도 하듯 뒤늦은 폭우가 8월 내내 이어졌다. 도깨비처럼 오락가락, 가을을 재촉하는 비라고 하기엔 심술궂다. 이 시기 농사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빗줄기는 의외의 풍경을 빚기도 한다. 설악산 토왕성폭포 전망대를 오른 날도 그런 날이었다.

만만하게 봤는데…역시 설악이다세차게 퍼붓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게릴라성 비가 내심 반가웠다. 사실 장마 끝 무렵이던 지난달 중순 토왕성폭포를 보기 위해 속초를 찾았다가 발길을 돌려 아쉬움이 컸다. 영동지역에 제법 많은 비가 내렸고 불과 3일이 지났을 뿐인데 폭포 물줄기는 이미 가늘어진 후였다.

설악산국립공원 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비는 곧 그칠 듯이 보였다. 구름에 가려졌던 산줄기도 또렷하고, 물기 머금은 숲에선 짙은 초록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신흥사 매표소를 지나 쌍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날 땐 금방이라도 목적지에 닿을 듯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도 그럴 것이 ‘비룡폭포(토왕성폭포 전망대)’ 코스는 주차장에서 2.8km, 1시간30분이 소요된다고 소개하고 있다. 15개 설악산 탐방로 중 권금성 다음으로 거리도 짧고 쉬운 코스다. 설악산에서 가장 험한 공룡능선(19.1km, 14시간40분, 1박2일 코스)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다.


시작 지점에서 쌍천을 따라가는 약 1km 구간은 산책로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기분 좋은 숲길이다. 금강소나무를 비롯한 아름드리 상록수와 활엽수가 적당히 섞여 있고, 어두컴컴한 숲에서 내뿜는 나무와 흙 내음에 머리까지 맑아진다. 비의 양도 적당해 쌍천의 반질반질한 돌덩이로 흐르는 물소리도 청아하다.

‘토왕성폭포 전망대 1.2km’ 이정표를 통과하면 그제서야 본격적인 등산로다. 계곡 따라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고 물소리도 한층 소란스러워진다. 여태껏 온순하던 길은 육담폭포 부근에 다다르면 갑자기 하늘이 툭 트여 악산(惡山)의 본 모습을 드러낸다. 바위 절벽 사이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가 연속해서 6개의 소(沼)를 형성했다는 곳이다. 낭떠러지를 가로지르는 출렁다리(육담교)가 폭포와 어우러져 아찔하고 시원하다. 사실 계곡이 시작될 때부터 작은 폭포와 물 항아리가 이어져 6개 폭포가 정확히 어느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400m만 오르면 비룡폭포이고, 또 그만큼만 더 가면 토왕성폭포 전망대에 닿으니, 거리상으로는 거의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금 더 가팔라진 산길을 오르면 마침내 한줄기 굵고 하얀 물줄기가 세차게 내리 꽂히는 비룡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앞까지 이어진 탐방로에 서면 시원한 물줄기에서 흩어진 물보라가 비처럼 번진다. 귀를 찢는 듯한 웅장한 물소리를 뒤로 하고 드디어 최종 목적지 토왕성폭포 전망대로 향한다.
설악산 토왕성폭포, 구름 뚫은 물기둥… 전설의 비룡을 보는 듯

비룡폭포 코스는 설악산 등산로 중에서 가장 쉬운 편이다. 시작은 편안하고 아늑한 숲길이다.

‘전망대까지 편도 410미터이며 약 20분 소요됨.’ 계단이 900여 개라고 하지만 너무 대충 계산한 게 아닐까. 평지면 4분 정도에 갈 수 있는 거리이니 넉넉하게 잡아 10분이면 될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설악산 탐방로 중에는 난이도 ‘하(下)’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 쉽게 봤다가 ‘저질 체력’만 확인한 꼴이 됐다. 수직에 가까운 계단을 100미터 정도 오른 후부터는 한발한발이 천근만근이다. 설상가상으로 그쳐가던 빗줄기도 다시 굵어지기 시작했다. 안개인 듯 기어오르는 구름이 계곡 맞은편 능선을 완전히 삼켰다. “폭포 잘 보이던가요?” 조바심은 커지고 하산하는 등산객들에게 자꾸만 확인한다. 상황은 오를수록 나빠졌다. 마지막으로 들은 대답은 결국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전망대를 코앞에 두고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 쉬며 물기 흥건한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침내 토왕성폭포, 설악의 전설을 쏟아내다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전망대에 올랐지만 예상대로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에서 직선 거리로 1km나 떨어진 폭포는 더더욱 보일 리 만무하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우산은 제 역할을 못하고 몸은 이미 흠뻑 젖었다. 이대로 하산하기엔 억울했다.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보다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더 커졌다.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던 물줄기는 다시 구름에 가려지고, 빗줄기도 강약을 반복하며 그칠 줄을 몰랐다.

그 사이 몇몇 등산객은 아쉬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대학생 때 산악회에서 활동했다는 안재영(57)씨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초조한 눈빛으로 구름이 걷히길 기다리고 있었다. 산은 언제 어떻게 변할 지 모른다는 그의 말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대학 산악회 회원들에게 토왕성폭포 빙벽 등반은 꿈이자 로망이었죠. 저도 30여년 전 빙벽 훈련을 할 때 하단폭포까지 올라 본 적이 있습니다.”화채봉에서 발원한 토왕성폭포는 칠성봉을 끼고 돌아 노적봉 남쪽 토왕골로 떨어지는 총 320미터(상단 150, 중단 80, 하단 90미터) 높이의 국내 최대 폭포다. 그러나 발원지에서 폭포 상단까지의 길이가 짧고, 지형의 폭도 좁아 물을 많이 담지 못하는 까닭에 비가 내린 후 2~3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비룡폭포에서 토왕성폭포 하단에 이르는 토왕골 계곡은 낙석이 잦고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어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이곳 전망대 탐방로도 2015년 12월에야 개설해 먼 발치에서나마 그 장관을 볼 수 있게 했다. 당시 45년 만에 개방한 코스라고 대대적으로 알려졌는데, 설악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1970년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그때가 첫 개방인 셈이다. 지금도 토왕골 계곡은 전문산악인들에 한해 겨울철 빙벽 훈련 장소로만 개방하고 있다.

빗속에서 약 30분을 기다렸을까, 정면 거대한 절벽 꼭대기에서 어렴풋이 물줄기가 보이는가 싶더니 일순간 짙은 구름이 거짓말처럼 말끔하게 걷혔다. 함께 기다리던 10여명의 등산객들 모두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와~!’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상상력을 극대화한 수묵화처럼, 중국 무협지의 과장된 묘사처럼,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대자연이 펼치는 파노라마에 그대로 압도당한 표정이다. 폭포 양편으로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쏟아져내려 산 전체가 거대한 폭포를 이룬다. 그 사이 비구름은 첩첩 바위 능선을 휘감고 절벽을 오르내리며 세심한 붓 놀림으로 그림을 완성한다. 용과 신선을 등장시켜 터무니없다고 생각해온 수많은 전설들이 눈 앞에 그려진다. 그렇게 20여분간 설악의 장엄한 쇼를 마무리하고 토왕성폭포는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여행수첩]●설악산 탐방로는 비가 많이 오면 출입을 통제한다.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033-636-7700)에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 토왕성폭포는 비가 내린 후 2~3일간 제대로 볼 수 있고, 역광에 방해 받는 오후보다 햇살이 바위 절벽을 붉게 비추는 아침이 더욱 좋다. ●속초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7ㆍ7-1번)를 이용하면 신흥사 입구까지 약 40분이 걸린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주차료 5,000원. ●전국의 많은 국립공원에서 겪는 달갑지 않은 경험을 이곳에서도 하게 된다. 권금성 케이블카를 이용하든, 등산이 목적이든 탐방로가 신흥사 경내를 지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흥사 입장료’ 3,500원을 내야 한다. 작지 않은 금액이지만 신용카드는 불가하고 현금만 받는다. 매표소 바로 옆에 친절하게도(?) 현금인출기를 설치해 놓았다.

choissoo@hankookilbo.com
17일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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