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71)New Deal 과 흑인들

2017-08-25 (금)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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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Deal 정책들은 묵은 농토를 쟁기질하여 땅의 활력을 회생시켜주는 것처럼 미국민 각계각층과 전국에 심대한 영향을 준 개혁이었지만 FDR은 흑인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대통령은 아니었던것 같다. FDR 이 New Deal 입법들에 한참 심혈을 기우리고 있던중 일부 국회의원들이 Anti-Lynching 가중 처벌법을 입법할것을 건의 하였었다.

Lynching 은 오래전부터 미국의 남부주들에서 정당한 이유도 없이, 때로는 죄를 뒤집어 씨워서, 백인들이 흑인들을 집단폭행하거나 공권력의 묵인아래 불법적으로 “교수형”을 시키는 끔직한 일이 었었다. FDR 때 까지도 종종 일어나던 일이 었었다.

Lynching 이 근절되어야할 불법적인 악행임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FDR 은 “만일 내가 그법을 제정하고 나면 남부의원들의 저항으로 앞으로 모든 New Deal 정책들이 입법되지 못할 것이오!” 라고 말하면서 완곡하게 거절 하였었다고 한다.


New Deal 정책들에는 딱히 흑인들 에게만 혜택을 주었던 배려는 없었던듯 하다. Tennessee Valley 에 짛은 모범주택들에 흑인들은 입주할수도 없었고 도리어 노동자의 고용과 해임시에 흑백차별이 있었으며 임금액수에도 차별이 있었었다고 한다.

대공황이 진행중이었던 1930년에는 미국흑인들 80% 는 남북전쟁때에 독립하여 Confederacy 라고 불렸었던 남부주들에서 살았었다. 남부주들은 미국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이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천대받고 어려운 사람들은 흑인들이 었었다. 흑인들은 노예로 있었을 때에는 최저한의 의식주는 보장받고 있었지만 노예해방후에는 아무 보장도 없는 유급노예와 같은 고난이 계속되었으나 선뜻 남부를 떠날줄도 모르고 살고들 있었다.

흑인들은 흑인촌에서 몰려들 살았으며 집을 살 은행주택융자등은 불가능 하였었고 교육도 열등한 흑인학교에서 받았으며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투표권도 행사하지 못했었다. 어떤 주에서는 인구의 과반수가 흑인이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전혀 없었었다.

그런데 메마른 황무지에서 잡초의 새싻이 솟아나는것 처럼 이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탁월한 흑인지도자들이 움트기 시작하였었다. 사실은 노예해방 전에도 주인네 자녀들 글공부할때 어깨넘어로 글을 배운 흑인들도 있었고 가끔 총명한 어린노예의 재질을 아낀 주인이 법을 어겨가면서 교육을 시켜준 경우들도 있었다고 한다.

남북전쟁전에
Nat Turner 나 Denmark Vesey 같은 흑인 반란두목들에 의한 두어번 흑인들의 무장봉기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었다. 흑인 노예출신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던 노예해방주의자 언론인 Frederick Douglass 는 남북전쟁중에 흑인들을 설득하여 북군에 흑인연대 두부대를 창설하여 참전하게 하였었고 남북전쟁 종전후에는 Washington, D.C. 의 Marshall 을 지냈으며 주 Haiti 미국총영사를 지냈었다. 1900년대 초에도 Booker T. Washington, W.E.B. Du Bois 박사등 두각을 나타낸 흑인 지도자들이 있었다.

1800년대말에 주로 백인들이었던 개혁주의자들이 세력결속을 위해서 빈곤층들의 지지를 규합하려고 하다가 깜짝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남북전쟁 종료후인 1867년에 통과된 연방헌법개정15항에 의하면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도록 되어있는데 만일 흑인들이 투표권을 모두 행사한다면 백인들은 모든 선거에서 꼼짝없이 패배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백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흑인들이 투표할수없는 “합법적”인 제도들 만들기 시작하였다.


1895년에 시작하여 7개의 남부주들은 “헌법개정 제15항” 의 집행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Grandfather Law” 라는 특별법을 입법했다. 이 법으로 “조상이 1867년에 투표권이 있었던 사람에 한해서 자동적으로 투표권을 준다” 는 것이고 그외의 사람들은 “선거판사” (election judge) 라는 공무원 앞에서 글을 읽을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투표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 법으로 흑인들 대부분은 자동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할수 없게 되었는데 가끔 어떤 흑인이 건방지게 글을 읽겠다고 하면 선거판사는 헌법중 가장 어려운 대목글 읽고 해설해 보라고 했었다고 한다. 이 “어거지법”은 1915년에야 대법원의 위헌판결을 받았었다.

또 다른 흑인투표 저지방법은 투표자 등록때 내도록 했던 불과 몇불의 Poll Tax 라는 세금이었는데 많은 흑인들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었고 혹 어떤 흑인이 당돌하게 Poll Tax 를 내고 투표를 하러가면 선건판사는 납세영수증에 하자가 있다고 트집을 잡아 투표권을 주지 않았었다고 한다.

남부주들에서는 민주당이 압도적인 다수당이었음으로 “민주당의 공천”은 본선거에서의 승리를 의미하였다. 백인들은 공천선거인 primary 에서 흑인들이 혹시라도 공천이 되는 일이 없도록 했어야만 했다. 머리를 짜낸끝에 그들은 “민주당은 private club 임으로 백인만이 회원이 될수있다” 라고 하면서 흑인들을 제외시켰었다.

일부 각성이 있던 백인들은 흑인인권향상에 동참하였으며 신체불구자로써 부호의 외동딸이었던 Jane Adams 는 Chicago 에서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서 독자적으로 Community Center 라는 사회사업을 하면서 흑인인권옹호에 헌금을 하였었다. 흑인인권향상을 위해 Du Bois 박사에 의해 시작된 “Niagara Movement” 는 점점 활발해졌고 인종폭동을 예방하기 위해서 1909년 Lincoln 의 생일날에 NAACP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가 창립되었다.

NAACP 는 지금까지 많은 회원들을 가지고 흑인인권향상을 위해 수많은 업적을 내었는데 1915년에 Grandfather Law 가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도록 하였었고 흑인이 피고인이된 재판의 배심원단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으면 위헌이란 판결도 받아내었다. FDR 은 장관급의 고급공무원으로 흑인들을 기용하였으며 그의 부인 Eleanor 여사도 흑인인권향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나 흑인들의 위상이 괄목할 정도로 상승되지는 못하였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후에 뉴욕의 Harlem 에서 Black Renaissance 라고 불리우던 New Negro Movement 가 흑인시인, 작가, 학자, 미술가,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New Deal 정책의 “창작자도움” program 의 지원도 받아서 활동하며 전국 여러도시의 흑인 문화활동도 시작되도록 하였으나 1930여년부터 시들어 졌었다고 한다. 이 움직임에도 Du Bois 박사의 공로가 컸었다고 한다.

1980년대초에 Harlem 에서 우리동포들이 많은 가게들을 구입하고 성업을 하고 있었었는데 흑인손님들에게 인종차별적이고 불친절하다는 소문이 지역주민들에게 나기 시작하자 한때 불매운동이 났던 일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흑인들의 Mecca” 를 굴러들어온 돌멩이들이 “오염”했다고도 생각했던듯 하다.

흑인의 위치는 서서히 상승하고 있어서 FDR 은 선거때마다 흑인들의 지지를 점점 더 받아갔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향상의 속도는 너무 느린 것이어서 평생을 흑인운동에 헌신해온 Du Bois 박사에게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너무 절망적으로 느껴져 그는 공산당에 가입하고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1961년에는 93세의 나이에 Africa 의 신생국 Ghana 로 이민을 가버렸다.

다행히 젊고 끈질긴 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같은 흑인지도자들이 온갓 수난을 겪으면서 꾸준히 투쟁해온 결과로 1960년대에 실질적인 인권의 평등과 정의가 흑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까지 포함된 모든 소수민족들에게 주어지도록 되었었다. 솔직한 표현으로 미국에서 위계서열에서 흑인들 보다 밑에있는 우리나라 동포들은 흑인들의 인권향상에 따라 우리들의 인권도 자동적으로 따라 올라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것이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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