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좋은 생각’과 ‘삐딱한 생각’

2017-08-19 (토) 김완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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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코리아타운에 있는 전치과에 갔다. 기다리는 사람들 보라고 신문과 여러 잡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거기서 월간지 ‘샘터’와 ‘좋은생각’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 살 때 기차 역전이나 버스 터미널 가판대에 두 잡지가 나란히 꽂혀있었던 것을 보았지만 한 번도 ‘좋은생각’을 사 보진 않았다.

좋은 생각? 생각이야 마음껏 할 수 있지만 삶(존재)은 극히 제한적이고 생각을 실존으로 구현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 ‘좋은 생각’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자문으로 이어졌다.


사회를 ‘기능론’으로 파악하는 사람과 ‘갈등론’으로 파악하는 사람의 시선은 많이 다르다. 또,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과 상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의 세계관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 보수적 관점에선 ‘좋은 생각’이 진보적 관점에선 ‘나쁜 생각’일 수 있고, 우파적 시각에선 ‘나쁜 생각’이 좌파적 시각에선 ‘좋은 생각’일 수 있다.

특정 종교가 있는 신자의 입장에서 ‘좋은 생각’이 종교가 없는 비신자의 입장에선 ‘나쁜 생각’일 수 있다.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생각’이란 게 있을지 몰라도, 상대적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겐 ‘좋은 생각’이란 그리 간단하게 단정할 문제가 아니다.

‘좋은 생각’이란 말엔 이미 ‘나쁜 생각’이 내재되어있는 이분법적 사고가 숨어있다. 선과 악 즉, 흑백논리가 도사리고 있다. 다양성이나 중립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중된 사고방식이 잠재되어 있는 닫힌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도덕과 윤리적 가치를 자유보다 우선시하는 태도다.

사람은 저마다 생각과 시선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생각’이란 것도 철저하게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무엇이 ‘좋은 생각’이란 말인가. 민주사회에서는 ‘좋은 생각’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생각’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다양한 생각’이 존중되는 사회는 역동적이고 창의적일 수 있다. ‘좋은 생각’만 하는 사회는 도덕적일지는 몰라도 다양성이 사라질 것 같다.

왜 우리는 ‘좋은 생각’만 해야 하나? ‘삐딱한 생각’을 하면 안 되나? ‘좋은 생각’이 품은 함의는 규범적인 것, 모범적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체제 순응주의, 현실 순응주의다. 그에 비해 ‘삐딱한 생각’은 반항적이고 도전적이다. 체제나 현실의 모순에 비판적이고 저항적일 것이다. 고로 ‘삐딱한 생각’은 불량하고 불온하니 금물이라는 건가.

‘좋은 생각’이란 뉘앙스엔 사회적 자아보다는 개인적 자아가 더 커 보인다. 달리 말하면 참여적 자아보다는 관찰적 자아가 도드라져 보이는 어감이랄까. 비판적 지성(사회의식)을 품어 낼 수 없는 말 같다는 것이다.

애플 창업자인 고 스티브 잡스는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고 권한다. 아인슈타인, 밥 딜런, 마틴 루터 킹, 존 레논, 에디슨, 무하마드 알리, 간디, 피카소 등을 소개하며 “여기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 부적응자에 불평꾼, 문제아들입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사람들이죠. 사람들이 그들을 미쳤다고 할 때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천재를 봅니다. 정신 나간 사람만이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마련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열거된 ‘삐딱한 생각’을 한 사람들은 모두 창조적이었다. ‘좋은 생각’에만 집착하다 보면 고정관념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발전적이기보다는 퇴보 내지 답보상태에 머물기 쉽다.

권력이 부정하고 시대가 사회가 곪아터졌다면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해도 별 볼일 없지 않을까. 반대로 시대가 건전하고 사회가 건강하다면 굳이 ‘좋은 생각’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은 ‘좋은 생각’보다 ‘삐딱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권해야하는 시대 아닌가?

cheabin0423@hanmail.net

<김완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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