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떠나가는 준비

2017-08-12 (토) 06:17:10 장금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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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하는 것처럼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미련없이 떠날 수 있을까? 이제 할 일 다하고 자녀들도 자리잡았으니 운명대로 미련없이 갈 것이라고 평소에 말은 했지 준비는 안하고 있었다.

좋은 글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지만 읽을 때뿐, 머리로만 알고 가슴은 짐짓 모른 체하며 살아왔다. 내 삶의 종점이 어디인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모르는 지점에서 무엇부터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난감하다.

쓰지도 않고 관상용인 저 비싼 그릇들. 일상생활이나 분위기에 안 맞아 일년에 한두번 입고 모셔놓은 옷, 가방들. 살아 있을 때 주어야 가져 가겠지. 아니 옷 같은 건 취향도 칫수도 안 맞아 누가 고맙다고 받아갈 리도 없다. 그릇은 며느리에게 주면 어떨까. 모던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젊은이가 영국제 본 차이나는 구세대 것이라고 싫어할지도 모르지. 받아서 안 쓰기도 그렇고 부담주게 될지도 모르니 가기 전 정리해야지. 아 가소롭다.


가는 마당에 이런 부질없는 생각까지 하니 얼마나 내가 잘 못 살아온 것인가. 평소에 손주들 대학 갈 때까지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럼 미련없이 떠나갈 거라고 말했지만 만약 그때까지 산다 해도 더 욕심이 생기겠지. 이제 죽음이란 글자를 앞에 두고는 머릿속이 거미줄처럼 갈래갈래 이어져 나간다. 마음 비우기라고 글도 썼었고 항상 지줄대지만 작은 일에도 화내고 오해하고 내 기분대로 살아온 것 같아 후회된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날 위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네.

그래. 난 세계 많은 곳을 여행도 했고 좋은 음식도 먹고 한때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도 했었잖아. 세계 속의 미국, 거기서도 특별한 실리콘밸리, TV 방송국에서 하고 싶은 일 하며 기량도 발휘했으니 미련 가지면 지나친 욕심이잖아. 불치병이 Why me? Why not me!세상만사 일체 유심조, 내가 즐겨 쓰던 말인데 이렇게 갈팡질팡하면 안 되지. 내일 의사를 만나러 가기 전에 식구 먹을 반찬을 만들어야지. 곰국도 끓이고 멸치볶음에 오징어무침에 오이지도 담고 나박김치도 담고 좋아하는 총각김치도.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더 급하지. 가깝다는 이유로 사랑이라는 말을 아끼고 살아온 건 아닐까. 살면서 정말 마음 상한 일도 미운 사람도 있었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별것 아니었던가. 그래. 모두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서받아야지. 아직 말할 수 있는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

<장금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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