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도 습작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글이라는 것은 잘 쓸 수도 못 쓸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인생이란 어쩌면 평생을 다 해도 완성할 수 없는, 어쩌면 미완의 습작인지도 모르겠다. 방황을 거듭했던 젊은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고 후회되지만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해도 (아무리 생각해도)이거다하는 신의 한 수는 떠오르지 않는다.
인생은 늘 실패에서 배우고 또 실패가 있기 때문에 인생이란 아프고도 아련한, 패이소스 있는 작품이기도 하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김성동의‘만다라’라는 작품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작가의 특별한 체험이 묻어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구도를 향한 우리들의 모습… 만다라라고 하는 불교소설의 특징 속에서 누구나 쉽게 갈 수 없지만 또 그 가보지 않은 길을, 저자의 체험이 묻어나는 치열한 사색을 통해 독자들과 공감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한번쯤 (읽어보았을,) 읽어볼만한 책임은 분명한 것 같다.
‘만다라’는 법운이라고하는 나(저자)와 지산이라고 하는 또하나의 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 지산은 함께 도를 닦는 도반으로 등장하지만 실은 그를 통한 또 하나의 나, 작가의 의식을 대변하고 있다. 땡중이지만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있었던 지산은 틀에 박힌 수도 생활을 버거워하다가 결국 어느 겨울날 만취상태에서 얼어죽고 만다. 지산에게 도란 결국 끝없는 의문과 허무의 연속이었을 뿐이었다. 이야기는 결국 주인공이 파계하고 하산하는 것으로 결론 맺고 있는데, 이것은 끝이 아니라 또다른 도약을 위한 시작, 추락하는 새가 더 높이 날 수 있다는, 어떤 상투적인 소설의 룰을 제시하고 있기도하다.
만다라는 원(圓)을 뜻하기도 하며 불교의 연꽃을 말하기도 하는데, 목적을 향한…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동시에 그 모양은 각자 다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만다라’는 열반 속에서 또하나의 열반, 즉 性의 열반을 갈구하고 있는데 性은 가산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며 동시에 구도이기도 했다. 인간이 배제된 곳에서의 道, 또는 도가 배제된 곳에서의 인간이라는 모순된 순환은 그것이 석가이든 예수이든 가르쳐 줄 수없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이자 각자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문제는 그것이 지산을 타락시키면서 동시에 묶여있는 것에서 해방시키는 또 다른 해탈의 문이 되기도 했다는 점이었다.
만다라는 어쩌면 육체의 쾌락과 도의 교착점,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타락 속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다는 마음의 존재, 즉 연꽃으로 다시 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회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때묻지 않고 순결한 진흙 속의 만다라를 찾아 입산과 하산를 계속하는 소설 속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우리들의 모습… 또다른 의미의 만다라는 아닐까.
소설과는 조금 다르지만, 내게도 한때 방황하던 지산이 있었다. 물론 만다라 속의 지산이 반항아로서, 저자의 또 다른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나의 지산은 색다른 種으로서,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캐톨릭 신자였는데 신교의 모순을 회의하고 있었고 방랑자의 향수라고나할까, 법과 테두리 안에서가 아니라 자유 속에서 진정한 속박이 가능하다는 지론으로 나를 당황케하곤했다. 다시 말하면 법과 제도(즉 성경말씀으)로는 절대 구도될 수 없는 것을 기성종교에서는 거꾸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먼저 신비의 체험이 있어야한다 했다.
그의 신비란 다름아닌 (초현실적인 성령체험도 체험이지만) 마리화나 다른 육체의 쾌락도 도의 경지나 다름없으며 이런 것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를 제도한다는 것은 위선이며 만용이라는 것이었다. 진리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다. 물과 기름이 연합할 수 없듯, 쾌락과 종교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영원히 타지도, 썪지도 않을 하나의 절대… 마음의 법을 찾아헤매고 있던 나에게 그는 유혹이자 동시에 함정이기도 했다.
물론 그는 어차피 속물적인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나의 삶 속에서 하나의 예언자와 같은 존재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가까이에서 영원히 산화(?)해 버리고 말았다.
진리(득도)란 결코 누구에게나 한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만다라는 말하고 있지만 이것으로 작가 김성동이 (한국)불교계에서 제적되고 말았다는 것은, 종교의 어두운 일면을 보여주는 역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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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