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은퇴하고 시작하는 새 살림

2017-07-29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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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로 동부 여행 중 웨스트버지니아의 친구 집을 찾았다. 30여년 가족처럼 지내는 백인 부부이다. 60대 후반인 이들은 지난 해 은퇴를 하고 새 집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부부가 직접 디자인하고 건축자재를 일일이 고르며 지은 그들의 새 보금자리를 구경할 겸 방문했다.

호숫가에 부지를 마련했다는 정도만 알고 찾아간 집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한 바퀴 돌면 2마일인 호숫가를 따라 집들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어 동네는 아늑하고 고요했다. 친구네 집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다. 높은 천장에 전면이 유리창과 유리문으로 되어있는 거실에 앉으니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새 집, 새 가구, 새 집기들 … 부부에게 추억과 의미가 있는 물건들을 제외하면 모든 게 새 것들이었다. 은퇴를 하면서 부부는 새 살림을 차린 것이었다.

“집이 너무 좋아서 (당신들) 앞으로 50년은 더 살아야 겠다”고 농담을 했는데, 그러고 보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은퇴는 퇴장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 새로운 열정으로 새롭게 삶을 일구는 시기라는 사실, 퇴장을 준비하기에는 남은 날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인생의 봄 여름 가을 지나 은퇴하면 바로 겨울이었다. ‘환갑노인’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다. 이제는 계절이 하나 더 끼어들었다. 제2의 가을이다.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생명력이 너무 왕성하니 두 번째 가을쯤 될 것이다.

지난 2009년 하버드의 사회학자 새라 로렌스-라잇풋 박사는 ‘제 3의 장’이라는 책을 내서 관심을 모았다.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이 길어지면서 인간의 생애에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장이 생겼다는 내용이다.

책의 부제는 ‘50세 이후 25년의 열정과 위험 그리고 모험’ - 저자는 과거 ‘고령’으로 분류되던 이 나이를 주목한다. 50세에서 75세까지 나이는 젊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요즘 기준으로 늙지도 않은 나이라며 인생에서 아주 의미 깊은 새로운 성장의 시기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남녀 40명에 대한 심층 인터뷰를 토대로 은퇴는 퇴장이 아니라 변신의 계기라는 21세기의 추세를 보여준다. 평생 화학분야에서 일하던 사람이 60대 후반에 조각가로 변신하고, 신문기자가 은퇴 후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며, 건축가가 70세에 고고학에 심취하는 등이다.

이런 변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관심과 호기심. 수십년 살아온 익숙한 울타리에서 눈을 돌려 새로운 세상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도전해보는 것이다.


은퇴 10년 차인 남가주의 주부 박희경 씨도 호기심 넘치는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계속 뭔가 배우고 싶어요. 그림을 배우고, 피아노도 배웠고,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중국어도 공부했어요. 아들이 어려서 쓰던 바이올린이 집에 있는데, 요즘은 그걸 볼 때마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져요.”

그의 나이 70대 중반, 배움의 열정이 그렇게 줄기차게 새록새록 솟을까 신기해하니 그가 말했다.

“항상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요.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거든요. 긴장을 늦추면 (심신이) 늘어지고, 그렇게 되면 바로 늙지요.”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 그래서 지난 삶을 돌아보며 이제까지 못해본 일들을 과감하게 시도해 볼 수 있는 나이가 은퇴 즈음이다. 새로운 시도에 기본적으로 담겨야 할 요소는 재미와 의미. 삶이 풍요롭기 위해서는 의미가 필요하다. 자원봉사나 신앙생활은 노년의 삶에 의미를 더해준다.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재미. 나이 들수록 인생이라는 여인숙에는 슬픔의 손님이 자주 찾아든다. 늙고, 병들고, 떠나가는 소식들이다. 평소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

최초의 100세 마라토너로 유명한 할아버지가 있다. 인도 푼잡 태생으로 런던에 사는 파우자 싱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지난 2000년 89세에 런던 마라톤에 처음 출전한 후 10여년 마라토너로 활동했다. 그가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 중반 아내와 아들을 한해에 잃고 깊은 상심에 빠졌던 그는 달리기를 탈출구로 삼았다. 달리면 가슴에서 기쁨이 솟는다는 그는 106세인 지금도 하루 서너 시간씩 걷고 달린다.

지구라는 행성에 발 딛고 사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시간의 보너스를 받은 대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그래서 새로운 열정으로 과감하게, 실패할 위험을 불사하며 모험을 해보는 재미있는 시기라는 생각이다.

나이 60대 70대라면 뭘 망설이는가, 지금 안 해보면 언제 해보겠는가. 호기심 넘치는 도전정신 - 인생 제 3의 장을 사는 비결이다. 새 살림 차리듯 그렇게 새롭게 사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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