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몸은 21세기, 의식은 20세기

2017-07-08 (토) 권정희 논설위원
작게 크게
워싱턴 포스트가 지난달 ‘백합(The Lily)’이라는 온라인 간행물을 시작했다. 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을 겨냥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에 올리는 소셜미디어 신문이다.

21세기 SNS 신문에 뜬금없이 ‘백합’이라는 고전적 이름을 붙인 데는 이유가 있다. 미국에서 여성이 발행한 최초의 신문이 백합, 더 릴리였다. 뉴욕, 세네카 폴스에 살던 아멜리아 블루머가 1849년 자기 집에서 여성을 위한 신문을 창간했다.


세네카 폴스는 1848년 7월 미국 최초로 여성권익옹호 대회가 열린 곳. 1세대 여권운동가인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이 충격적인 주장을 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대회였다. 바로 “여성도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스탠턴과 또 다른 여권운동가 수잔 B. 앤소니가 합류하면서 더 릴리는 명실 공히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계몽하는 신문이 되었다. 여성이 투표할 권리, 재산을 소유할 권리, 바지를 입을 권리 등이었다. 당시 이들은 30대 초중반의 신여성들. 지금 밀레니얼 세대 나이이다.

신문은 7년간 발행되다가 1856년 문을 닫았다. 그리고 161년이 지난 지금 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이 같은 이름의 신문을 보고 있다. 그 동안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상전벽해라고 할 만큼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남성에게 허용되고 여성에게는 금지되는 권리는 더 이상 없다. 그렇다면 이제 성평등은 이루어진 것인가.

뽕나무 밭이 짙푸른 바다가 될 만큼 거대한 변혁의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 이르렀지만 여성들의 마음은 종종 편치가 않다. 성차별적 선입관과 고정관념은 여전히 많은 남성들의 의식 속에 뿌리박혀 있다.

편견은 남성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통해 표출된다. 최근 여성보건저널에 마요 클리닉 소속 3명의 여자의사들이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은 컨퍼런스에 주제발표자로 나가면 사회자가 남자동료들은 ‘닥터 ~’로 소개하면서 왜 자신들은 ‘줄리아’나 ‘섀론’ 등 이름으로 소개하는 지 의아했다. 동료 여의사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요 클리닉에서 진행된 124건의 컨퍼런스 비디오를 분석, 남성 사회자가 여자의사를 ‘닥터~’로 소개하는 경우는 49%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남자의사들은 72%가 ‘닥터~’로 소개되었다. 의도적 차별은 아니더라도 여성을 전문적 직업인으로 존중하지 않는 편견이 무의식 차원에서 작용한다는 해석이다.


고정관념은 남성들의 태도로 표출된다. 대표적인 것이 ‘맨스플레인(Mansplain)’이다. 남자(man)와 설명(explain)을 합친 신조어로 남성들의 마초 의식을 표현한다. 여성은 가르치고 이끌어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에 매사를 설명하려드는 태도이다.

지난달 연방상원 정보위원회가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 러시아 내통의혹 청문회를 열 때였다. 가주 검찰총장 출신으로 이 분야의 전문가인 카말라 해리스 의원은 발언 중 두 번이나 멈춰야 했다. 남성 의원들이 그의 말을 끊고 끼어든 때문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미 전국의 여성들이 분개했다. 회의나 프리젠테이션 중 남성 상사나 동료가 끼어들어 말을 끊거나 대신 설명하는 일이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맨스플레인이다.

억만장자 사업가인 데이빗 본더만은 최근 또 다른 형태로 차별의식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우버 이사회에서였다. 우버는 성희롱 성차별 성추행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경영쇄신이 불가피해지자 외부기관에 내부조사를 의뢰했다. 조사보고서를 검토하는 회의에서 이사들 중 유일한 여성인 아리아나 허핑턴 전 허핑턴포스트 창업자가 여성이사 영입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본더만이 “말 참 많아지겠군”하는 반응을 보였다가 제대로 망신을 당했다.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사과와 함께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가장 저급한 성차별 의식은 노골적 여성비하로 표출된다. 남성은 본능으로 당당하고 여성은 그 대상일 뿐이라는 인식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이를 모자람 없이 보여주고 있고, 우버 성공신화의 주역인 트래비스 칼라닉 역시 온갖 성희롱 성추행 스캔들에 휩싸이다 최근 CEO 자리에서 밀려났다.

한국도 다를 리 없다. 대학시절 친구의 성폭력 모의에 동조한 것이 무용담이나 되는 듯 자서전에 실은 모 당대표, 좋아하던 여성을 잡아두기 위해 가짜 혼인신고를 했다는 전 법무장관 후보자, 여성을 성적욕구의 대상으로만 보며 ‘남자마음 설명서’를 펴낸 청와대 행정관 … 모두가 성평등 의식 지진아들이다.

몸은 21세기에 있지만 의식은 20세기 중반쯤에 있는 남성들이 많다. 남녀평등을 원칙으로는 인정하지만 의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남성들이다. 161년이 지난 지금도 더 릴리가 필요한 배경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